소셜 시큐리티 카드 발급이 저절로 될 리가
시카고에 도착해서 이민가방들을 풀고 며칠간 푹 쉬었다. 단기간에 한국 생활을 뿌리째 뽑아 오느라 극도로 과열된 몸과 마음의 힘을 빼는 시간이었다. 많은 이민 선배들이 미국에 랜딩 하자마자 호텔이나 에어비앤비에서 지내면서 소셜 시큐리티 카드(Social Security Card)를 신청하고, 집을 구하고, 아이들 학교를 방문하고, 운전면허를 따고, 필요한 물건을 사다 나르느라 바삐 다니던데... 우리는 무슨 복인지 아니면 배짱인지, 일단 다 내려놓고 푹 쉬기만 했다. 그렇게 쉬어준 만큼 몸과 마음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동네 마트들을 하나씩 다니며 어디에서 무엇을 사야 하는지, 현지 물가는 어느 정도인지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했다. 월마트, 코스트코, 주얼오스코(Jewel-Osco), 마리아노스(Mariano's), 트레이더조(Trader Joe's), H마트, 중부시장, 타겟, 마이어스(Meijer's), 일본 마트(Mitsuwa)... 무슨 마트 종류가 그렇게나 많던지. 각각의 특징이 있었고 주력 상품이 있어서 어느 한 곳에서 원스탑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주로 이마트 쓱배송으로 목적이 이끄는 쇼핑만 하던 나는, 장보는 취미가 있는 남편의 손에 이끌려 미국 마트들을 하나씩 정복(?)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미국 음식이 입에 잘 안 맞았는지 마음이 허해서 그랬는지 주구장창 한국 음식만 찾아댔다. 이민 오면 영어는 안 늘고 요리 실력만 는다더니 진짜 그랬다. 유튜브에서 요리 채널을 찾아보고는 장 봐와서 레시피 따라 만들고 먹고 치우다 보면 또 식사시간이 왔다. 신전떡볶이, 김밥천국, 멕시카나치킨 같은 것들이 문득문득 떠올랐지만 한정된 재료를 이용해 요리 채널을 따라 만드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고, 식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보람도 있었다. 결국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
며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소셜 시큐리티 카드 발급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미국 이민 비자 서류를 제출할 때 그린카드(영주권)와 함께 소셜 시큐리티 카드를 발급 신청해둔 상태였는데, 미준모(네이버 카페)에서 간혹 온라인 신청이 잘 처리되지 않아 몇 달씩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는 글을 보고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게 있어야 은행 계좌를 만들어 한국에서 해외이주비 송금도 할 수 있고, 국제 면허 만료 전에 운전면허도 딸 수 있고, 취직을 하더라도 급여 이체가 가능하다보니 미국 랜딩 후 처리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었던 거다.
오전 9시 오픈 시간 전 근처 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 앞에 줄을 섰다. 날은 이미 추워져 덜덜 떨며 밖에서 한참을 기다려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사람들이 이미 바글바글했다.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한숨과 함께 들려왔다.
“한심하다 한심해. 나 벌써 세 번째 여기 오는 거야.”
“말도 마. 난 네 번째야.”
허리에 총을 찬, 한 200킬로는 족히 나가 보이는 경비가 물은 바깥에 나가서 마시라고 계속 소리치고 다니는데 한 백인 아줌마가 아랑곳 않고 물을 마시다가 바닥에 쏟았다.
경비가 뒤뚱거리며 오더니 물었다.
“내가 물 마시지 말라고 했지? 누구야 이거??”
내 앞에 앉았던 아기엄마가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난 아냐. 저 여자가 그랬어.”
손가락질을 당한 백인 아줌마는 갑자기 히스테리를 부리며 꺼이꺼이 오열을 시작했다.
“나 암환자야. 방사선 치료랑 항암치료를 받고 있어서 5분에 한 번씩 물을 마셔줘야 된다구! 내가 이 몸을 해가지고 5분에 한 번씩 물을 마시러 밖에 나갔다 와야 되겠어? 늬들이 내 고통을 알아? 늬들이 뭘 알겠어??!!!”
경비는 휴지를 산더미처럼 뽑아와 쏟아진 물을 발로 쓱쓱 닦으며 성질을 냈다. “내가 알게 뭐야! 하여튼 물은 밖에 나가서 마시라구!” 건물 안은 웅성웅성.
잠시 후 후한이 두려웠는지 자아성찰을 했는지 경비가 다시 뒤뚱뒤뚱 걸어와 백인 아줌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조금 아까 내가 한 말은 정말 미안해. 당신 상황을 잘 모르고 한 소리니 용서해 주겠어?” 그러더니 그 여자 건을 빨리 처리해주겠다며 서류를 받아갔다.
내 옆에 앉았던 인도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참나... 우리도 저 여자처럼 물 쏟고 한바탕 울까?” 동방예의지국 출신 이민 신생아는 이 포인트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 일이 아이들과 내가 앉아있던 곳으로부터 반경 1미터 내에서 일어났고, 덕분에 2시간 넘는 대기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드디어 우리 번호를 부르길래 공무원 앞에 가 앉았다. 그린카드와 함께 온라인으로 신청한 소셜 카드 발급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러 왔다고 했다. 랜딩 한 지 며칠 되었냐고 묻길래 6일 되었다고 했다.
공무원은 어이없다는 듯 눈알을 굴리며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온 지 겨우 6일 되었는데 무슨 확인을 해? 4주는 더 기다려보고 그때도 아무 소식 없으면 다시 와. 이민국에서 우리 쪽으로 정보가 넘어오는 데만 몇 주씩 걸리는데,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와우. 여기가 바로 말로만 듣던 미국이로구나. 그간 흉보던 대한민국 공무원들과 시스템이 새삼 위대하게 느껴졌던 순간. 카드 발급 신청만 해놓으면 원스탑으로 알아서 착착 진행되고 어느 단계에 와있는지 조회도 될 걸로 기대했던 안일함이라니. 빨리빨리의 나라에서 막 건너온 이민 신생아들의 본격적인 삽질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