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초등학교 입학이 쉬울 리가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말고 미국으로 건너온 큰아이를 한동안 집에 품고 있다가, 일단 시카고 아주버님 댁에서 근처 공립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원래는 남편 일자리를 찾는 대로 우리가 살 집을 구하고 나서 배정되는 초등학교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모든 게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모의 정착이 지연된다고 해서 아이의 적응까지 지연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조카가 다니는 동네 초등학교에 가서 문의를 했더니 우리가 사는 집 주소지 증명을 제출하라고 했다. 남편이나 내 이름으로 된 유틸리티(전기세/물세/가스비) 고지서나 렌트 계약서, 아니면 주소지로 온 우편물(은행 잔고 증명서 등)을 제출하라고 요구했지만 우리는 정말이지 저 중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버님 댁에 얹혀살고 있었으니 우리 이름으로 된 유틸리티 빌이나 렌트 계약서가 있을 리도 없고, 소셜 시큐리티 카드가 발급되지 않았으니 은행 계좌도 잔고 증명도 당연히 없는 상태였고 말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비자를 받고 일단 ‘랜딩’부터 한 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미국에 들어오는지, 이게 단순히 비용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찬찬히 설명했다. 그랬더니 ‘Affidavit(진술서)’ 형식을 하나 내주면서 그 문서에 아주버님이 우리와 함께 같은 주소지에 살고 있다고 진술, 서명하고 공증을 받아오면 해당 주소지에 살고 있는 걸로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리서치의 황제인 남편은 근처 동사무소에서 공증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걸 찾아냈고, 이튿날 아침 일찍 아주버님을 모시고 가 진술서에 서명과 공증을 받아왔다.
이외에도 학교에서 요구하는 서류는 출생증명서(birth certificate), 여권/비자 사본, 예방접종기록이었는데, 우리는 또 하나의 난관을 만났다. 한국을 떠나기 전 집 근처 보건소에서 예방접종증명서를 영문으로 발급받아 왔고, 비자 서류에도 접종기록이 있어서 둘 다 제출하면 되겠지 했는데, 학교 보건실 간호사는 일리노이주 의사에게 검진을 받고 그 의사가 확인해준 접종만 인정해주겠다며 깐깐하게 굴었다. 이름 모를 기관에서 발급해준 기록은 소용없고 일리노이주 서식에 작성된 것만 인정된다고 강조하면서.
비자 신체검사와는 별개로 또 한 번의 신체검사를 해야 하는 거였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국 안에서 간단한 진료를 해주는 CVS Minute Clinic에서 아이 신체검사를 다시 하는데, 한참 잘 진행하던 의사가 갑자기 어느 나라에서 이민 온 거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리스트를 찾아보고는, 그러면 결핵검사 대상이라고 했다. CVS에서는 결핵검사를 해주지 않으니 근처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이상 없다는 결과를 가져오면 신체 검사지에 표시해 주겠단다. 그 결과지를 받아오기 전까지는 아무 확인도 해줄 수 없단다. 검사 비용이 200불 내외로 들 거라고 친절한 안내까지.
‘후...... 세상에 요즘 같은 시대에 결핵이라니!’
잠시 내 숨소리가 내 귀에 크게 들렸다. 심호흡을 하며 눈알을 굴리며 빠르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여의도성모병원 신체검사실에서 채혈한다고 애 잡을 뻔했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맞다, 그때 그게 결핵검사였지!!!’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고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가 이민 비자를 받기 위해 불과 몇 개월 전에 한국 병원에서 결핵검사를 한 적이 있다고, 결과지를 한국에서 받아올 수 있으면 확인해 줄 수 있겠냐고. 의사는 쿨하게 오케이 했다.
집에 돌아와 한국 근무시간에 맞춰서 여의도성모병원 비자 신체검사실에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서는 결핵 검사지를 영문으로 발급해줄 수는 있지만 직접 수령만 가능하며, 수령인이 본인이 아닐 경우 위임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염치 불구하고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을 드렸다. 어머님은 언제나처럼 흔쾌히 도와주셨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 EMS로 결핵검사 결과지를 받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만세! 어머님 만세! 미국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했어도 아마 이렇게 빨리 결과를 받을 수는 없었을 거다.
우여곡절 끝에 큰아이 첫 등교하던 날. 1년 반 전 한국에서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보다 더 떨려 잠도 설쳤다. 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꿈을 꾸다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싸느라 부산을 떨었다.
아침식사를 하며 아이가 물었다.
“아... 긴장된다 엄마... 내 이름 스펠링이 뭐였더라?”
잽싸게 컨닝페이퍼를 여기저기에 써붙여놓았다. 옆에 앉아 시리얼을 먹던 조카가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Don’t worry, you’ll be fine... (걱정 마, 괜찮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