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뛰는 각자의 삶 각자의 생각
각자 침대에서 핸드폰을 한다.
아무 말이 없다.
내 옆에는 6살 작은 여자 사람이 자고 있다.
각자 시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부부다.
알콩 달콩을 꿈꾸면서
서로 찰떡처럼 평생을 붙어서 살며
사랑을 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을 했다면
큰 오산이다.
결혼이라는 건
내 시간, 내 자유, 내 삶을 할애하는
포기의 미학이다.
체념의 복합체이며
무던함의 완성체일 것이다.
내가 어떤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과정과 감정은
나밖에 모른다.
형제도 부모도 다 각자의
감정과 사정을 가졌을 뿐이다.
하지만 연애와 사랑이라는 감정은
상대가 나와 비슷하고 같을 거라는 착각과
영혼이 이어져있다는 더 큰 크나큰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먼저 6년 해본 사람이 말해주건대
아니다.
그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조금은 나와 비슷하게 생긴
나와 그의 말투를 잘 흉내 내는
작은 사람도 생겼다.
이 작은 사람도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왜 분리해야 할까?
나도 한때에는
나와 결혼하는 사람은
나와 영혼까지 이어져있는 운명의 상대라
생각을 했었다.
나만의 방식, 나만의 단정은
나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쉽지만
마음으로 분리하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진행형 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며 살아온
결혼이란, 남편이라는 게 있기에
그 형태가 없는 내 마음속의 그것을
깨버리는 건 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리를 시키지 않는다면
모두가 즐겁지 않은 삶을 살 것만 같은
느낌이 시간이 지날수록 들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내가 즐거운 게 무언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았다.
세 가족이 평화롭게 맛있는 거 먹고
코 골고 잘 자고 웃으며 아침에 일어나는 것.
그런 삶이 매일매일이 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평소에는 그러기를 바랐다.
그래서 분리했다.
그와 나, 그리고 작은 사람까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 둘과 함께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서로를 응원하며 사랑하며 적응하며.
그렇게 분리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당신은?
이런 자연스러운 대화가 왜 그리 어려웠을까?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무자비함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지.
내 배우자는 내 당당한 막무가내를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옹졸한 생각을 가끔 했었다.
영혼의 단짝인데 나의 부족한 인성도
감싸줘야 그게 부부 아니야라는 부족한 생각은
나 자신을 그리고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냥 내 생각을 따라주는 게 나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으로서 나는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그 상황을 희생한 남편에게 역전의 상황에서
나에게 무조건적인 동의를 받는 카드를 하나 쥐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조건이 조건을 만들고
빚이 더 큰 빚과 이자를 만들고 있었다.
주는 대로 받고 받은 대로 준다
부부도 각자가 하나의 사람이다.
각자 동일선상에서 결혼과 부부라는
출발점에서 땅 소리와 함께 동시에 출발한
마라토너와 같다.
누군가 목이 마르면 가진 물도 나눠주고
누군가 지치면 같이 당기고 밀며 뛴다.
근데 내가 물을 줬는데
내가 목마를 때 줬던 물 다 마시고
없으니 참으라고 하면
같이 뛸 수 있을까?
기분 상해서 저 멀리 떨어져서
각자 뛰게 될 것이다.
물은 한 병인데 나 목마르다고
다 마신다면 상대는 나와 멀어져서 따로 뛰게 될 거다.
물 건네준 거 고맙다고 말하고
남겨주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속도 맞춰서 뛰는 마라토너 친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