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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달 Oct 04. 2020

부부는 그냥 너와 나라는 이름으로

같이 뛰는 각자의 삶 각자의 생각

 



각자  침대에서 핸드폰을 한다.

아무 말이 없다.

내 옆에는 6살 작은 여자 사람이 자고 있다.

각자 시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부부다.





알콩 달콩을 꿈꾸면서

서로 찰떡처럼 평생을 붙어서 살며

사랑을 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을 했다면

큰 오산이다.


결혼이라는 건

내 시간, 내 자유, 내 삶을 할애하는

포기의 미학이다.

체념의 복합체이며

무던함의 완성체일 것이다.


내가 어떤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과정과 감정은

나밖에 모른다.

형제도 부모도 다 각자의

감정과 사정을 가졌을 뿐이다.




하지만 연애와 사랑이라는 감정은

상대가 나와 비슷하고 같을 거라는 착각과

영혼이 이어져있다는 더 큰 크나큰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먼저 6년 해본 사람이 말해주건대

아니다.


그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조금은 나와 비슷하게 생긴

나와 그의 말투를 잘 흉내 내는

작은 사람도 생겼다.

이 작은 사람도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왜 분리해야 할까?


나도 한때에는

나와 결혼하는 사람은

나와 영혼까지 이어져있는 운명의 상대라

생각을 했었다.


나만의 방식, 나만의 단정은

나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쉽지만

마음으로 분리하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진행형 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며 살아온

결혼이란, 남편이라는 게 있기에

그 형태가 없는 내 마음속의 그것을

깨버리는 건 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리를 시키지 않는다면

모두가 즐겁지 않은 삶을 살 것만 같은

느낌이 시간이 지날수록 들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내가 즐거운 게 무언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았다.

세 가족이 평화롭게 맛있는 거 먹고

코 골고 잘 자고 웃으며 아침에 일어나는 것.


그런 삶이 매일매일이 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평소에는 그러기를 바랐다.

그래서 분리했다.

그와 나, 그리고 작은 사람까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 둘과 함께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서로를 응원하며 사랑하며 적응하며.


그렇게 분리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당신은?


이런 자연스러운 대화가 왜 그리 어려웠을까?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무자비함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지.

내 배우자는 내 당당한 막무가내를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옹졸한 생각을 가끔 했었다.


영혼의 단짝인데 나의 부족한 인성도

감싸줘야 그게 부부 아니야라는 부족한 생각은

나 자신을 그리고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냥 내 생각을 따라주는 게 나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으로서 나는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상황들은

그 상황을 희생한 남편에게 역전의 상황에서

나에게 무조건적인 동의를 받는 카드를 하나 쥐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조건이 조건을 만들고

빚이 더 큰 빚과 이자를 만들고 있었다.







주는 대로 받고 받은 대로 준다


부부도 각자가 하나의 사람이다.

각자 동일선상에서 결혼과 부부라는

출발점에서 땅 소리와 함께 동시에 출발한

마라토너와 같다.

누군가 목이 마르면 가진 물도 나눠주고

누군가 지치면 같이 당기고 밀며 뛴다.


근데 내가 물을 줬는데

내가 목마를 때 줬던 물 다 마시고

없으니 참으라고 하면

같이 뛸 수 있을까?

기분 상해서 저 멀리 떨어져서

각자 뛰게 될 것이다.

물은 한 병인데 나 목마르다고

다 마신다면 상대는 나와 멀어져서 따로 뛰게 될 거다.


물 건네준 거 고맙다고 말하고

남겨주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속도 맞춰서 뛰는 마라토너 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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