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발전 속도는 한 회계사의 성실함을 너무 쉽게 앞질렀다.
내 컴퓨터 안 깊은 폴더에는 남에게 보여주지 않은 원고들이 쌓여 있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AI와 회계』라는 제목의 초안들이다.
지난주 나는 「AI와 재무회계」를 주제로 2일간 연수 강의를 하면서 이 초안들을 다시 꺼내보았다.
이 원고는 3년 전, 대학교 경영학과에서 회계와 인공지능을 접목한 강의를 처음 개설하면서 틈나는 대로 나름 시간을 쪼개어 써 내려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글이 놀랍게도 2023년, 2024년, 그리고 올해 초에 작성한 2025년 버전까지 무려 3년 치의 초고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동안 게으름 탓에, 혹은 바쁜 일정 때문에 출간을 미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강의를 준비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AI, 특히 생성형 AI의 진화 속도였다.
2022년 말, 세상을 뒤흔들며 등장한 ChatGPT는 처음엔 허술했다.
간단한 분개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숫자 계산도 종종 틀렸다.
그러나 2023년과 2024년을 거치며 플러그인과 모델 업그레이드가 이어졌고, 회계 지식과 수치 처리 능력도 점차 향상됐다.
이제는 이미지까지 이해하는 멀티모달 기능을 통해 회계 자료를 직접 읽고, 분석 결과를 시각화하며, 더 정교한 Python 출력까지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어느 순간부터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24년 후반부터 2025년에 이르는 지금, AI의 답변에서 예전과 같은 기본적 오류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제 생성형 AI는 단순히 문서를 요약하거나 초안을 다듬는 수준을 넘어,
재무회계와 관리회계 실무 전반에 본격적으로 적용 가능한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조차도 손쉽게 회계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회계라는 학문은 흔히 숫자와 보고서로만 이해되지만, 그 범위는 훨씬 넓다.
기업이나 정부 등 모든 경제 주체의 기획, 재무, 생산, 인사 활동이 회계와 맞닿아 있다.
말하자면, 회계는 경제 활동의 언어이자 기록 체계다.
그동안 이 언어를 다루는 도구는 IT 시스템, 엑셀, 통계 패키지 등이었다.
그런데 이제 생성형 AI가 본격적으로 침투하면서, 회계 언어 자체를 새롭게 번역하고 재구성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 흐름은 단순한 보조적 도구의 진화에 그치지 않는다.
AI 에이전트와 생성형 AI가 결합하는 순간,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회계와 경영 정보의 세계가 재편될 것이다.
그 변화의 날이 오면, 우리는 회계를 단순한 보고 체계가 아니라
AI와 인간이 함께 사고하는 플랫폼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3년간 써온 초고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출간을 미뤄온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시대가 바뀌었고, 회계와 AI의 접점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전혀 다른 지평으로 확장됐다.
나의 원고는 과거의 기록이 되었지만, 그 빈자리가 새로운 서술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다만 씁쓸한 마음도 있다.
AI의 진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또 하나의 인간 전문가의 증거가
내 컴퓨터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전문가가 마주해야 할 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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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서 (경영학박사, 공인회계사, 보험계리사 – 한국외대/성균관대/건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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