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라는 엔진을 손에 넣고도, 왜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 멈춰 서 있는가?
AI라는 엔진을 손에 넣고도, 왜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 멈춰 서 있는가?
1. 서론: 두 개의 거대한 파도, 회계는 어디에 서 있는가?
2025년, 우리 회계업계는 두 개의 거대한 파도가 비즈니스 세계를 재편하는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첫 번째 파도는 이미 오래전 시작되었으나 최근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ChatGPT로 상징되는 AI의 혁명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의 진보를 넘어, 데이터로부터 추론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두 번째 파도는 상대적으로 조용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혁명적인, IFRS 9(금융상품)과 IFRS 17(보험계약) 등으로 대표되는 회계기준 및 그 측정 방법에 있어서의 변화다.
언뜻 보기에 이 두 파도는 별개의 변화처럼 보인다. 하나는 인공지능이라는 기술 담론이고, 다른 하나는 회계기준과 관련된 전문적 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은 ‘불확실성의 측정’이라는 동일한 지점을 향해 흐르고 있다. 세상의 패러다임이 ‘결정론적 사고’에서 ‘확률론적 사고’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시대의 명백한 징후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회계 업계에는 기이한 모순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에서는 회계가 기술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여 도태될 수 있다며 대응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회계법인과 기업들이 앞다투어 AI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재 업계의 AI 도입 논의는 마치 ‘엔진 없는 슈퍼카’를 자랑하는 것과 같다. RPA(Robotic Process Automation)를 통한 단순 반복 업무의 자동화, 생성형 AI의 단순 사용, 데이터 처리 속도의 향상 등 화려한 외관에는 열광하지만, 그 심장부에서 뛰어야 할 새로운 측정 방법론, 즉 ‘확률론적 평가’라는 엔진은 장착하지 않았거나, 장착하고도 애써 그 사용을 외면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통념과 현실의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한다. 첫째, 회계가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계 ‘기준’이 실무의 관성을 훌쩍 뛰어넘어 확률론적 미래에 먼저 도착했음을 명확히 밝힐 것이다. 둘째, AI의 발전이 회계와 별개가 아니라, 오히려 회계가 오랫동안 추구해 왔으나 기술적 한계로 구현하지 못했던 ‘확률론적 평가’라는 이상을 실현시켜 줄 핵심 열쇠임을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회계 공동체가 이 새로운 엔진의 시동을 걸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제언을 하고자 한다.
2. 이미 도착한 미래, IFRS에 내재된 확률론적 DNA
회계 측정에서 확률론적 사고가 대두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그 뿌리는 재무경제학과 회계학의 오랜 지적 유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2.1 사상적 뿌리를 찾아서: 마코위츠에서 CON 7까지
확률론적 평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1952년 해리 마코위츠(Harry Markowitz)의 포트폴리오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투자의 본질이 단순히 기대수익률(기댓값)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률의 ‘분산(Variance)’으로 측정되는 ‘위험’을 함께 고려해야 함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이는 자산의 가치를 단일한 기댓값이 아닌, 미래 수익의 ‘분포(distribution)’ 전체로 파악해야 한다는 사고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재무경제학의 사고가 회계 측정의 영역에 공식적으로 뿌리내린 결정적 계기 중 하나는 2000년 미국 재무회계기준위원회(FASB)가 발표한 개념체계보고서 제7호(Statement of Financial Accounting Concepts No. 7, CON 7)이었다. 이 보고서는 미래현금흐름 측정에 있어 두 가지 접근법을 명확히 구분하고, 확률론적 방법의 이론적 토대를 제시했다.
- 전통적 접근법(traditional approach): 미래에 발생할 ‘가장 가능성 높은(most likely)’ 단 하나의 현금흐름 시나리오를 추정하고, 여기에 위험을 반영한 단일 할인율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결정론적 사고에 기반한다.
- 기대현금흐름 접근법(expected cash flow approach): 발생 가능한 모든 현금흐름의 범위를 고려하고, 각 현금흐름에 해당 확률을 가중 평균하여 ‘기대현금흐름’을 산출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확률론적 측정 방법론이다.
CON 7은 회계 측정이 단일한 점 추정(point estimate)의 한계를 넘어, 불확실한 미래의 분포를 정보로 제공해야 한다는 패러다임 전환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도 이러한 생각과 맥을 같이 하면서 IFRS 13(공정가치 측정)을 거쳐, 마침내 IFRS 9과 IFRS 17에서 그 사상이 전면적으로 만개(滿開)했다.
2.2 핵심 증거: IFRS 9과 17, 확률론의 만개
IFRS 9과 IFRS 17은 확률론적 평가가 더 이상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닌, 회계의 새로운 표준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1]
IFRS 9 (금융상품): 기댓값으로 측정하는 미래의 손실
IFRS 9의 기대신용손실(expected credit loss, ECL) 모델은 과거 발생손실(incurred loss) 모델과의 근본적인 단절을 의미한다. 기준서에서 ECL을 “가능한 여러 결과의 범위를 평가하여 결정되는, 편의가 없고(unbiased) 확률로 가중된 금액(probability-weighted amount)”으로 정의한다(IFRS 9 문단 5.5.17). 이는 단순히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 하나를 가정하여 대손을 추정하는 결정론적 방식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실무적으로 이는 미래 거시경제에 대한 복수의 시나리오(예: 낙관, 기본, 비관)를 설정하고, 각 시나리오별 채무불이행률(Probability of Default, PD)과 부도시 손실률(Loss Given Default, LGD)을 추정한 뒤, 각 시나리오의 발생 확률을 가중 평균하여 손실의 ‘기댓값(expected value)’을 산출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경기 침체의 위험(tail risk)까지 미래 정보에 기초하여 금융상품의 채무불이행 발생위험의 변동을 재무제표에 선제적으로 반영하라는, 명백한 확률론적 요구사항이다.
IFRS 17 (보험계약): 불확실성 자체를 계량화하는 회계
IFRS 17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보험부채의 핵심인 이행현금흐름은 미래 현금흐름의 현재가치에 대한 명시적이고 중립적인 확률가중추정치(explicit, unbiased and probability-weighted estimate), 즉 기댓값(expected value)으로 측정된다(IFRS 17 문단 33, B37). 이는 IFRS 9의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2]
그리고 이러한 이행현금흐름에는 또 하나의 혁신인 ‘비금융위험에 대한 위험조정(Risk Adjustment for Non-financial Risk)’이 포함되고 이에 대한 구분 측정을 요구하고 있다. 위험조정은 미래 현금흐름의 금액과 시기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기업이 부담하는 보상을 의미한다. 이는 미래 현금흐름의 평균값(기댓값)뿐만 아니라, 그 평균값을 중심으로 한 변동성, 즉 확률분포의 불확실성 자체를 측정하여 부채 항목으로 계량화하라는 요구다. 따라서 이 위험조정을 통하여 불확실성에 대한 대가의 금액을 산정할 때 기업이 고려하는 분산 효과를 모두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IFRS17, BC214)
이러한 요구는 결정론적 세계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회계처리이며, 마코위츠가 주창했던 ‘기댓값과 분산’을 모두 재무제표에 담으라는 사상의 완전한 구현이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IFRS 9과 17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종업원급여, 무형자산, 각종 파생상품 등 다른 회계 분야 역시 확률론적 접근법의 발전적 적용이 필요하지만, 실무적 개선이 더딘 실정이다.
2.3 이상과 현실: 확률론적 항해사와 '결정론적 확률론'의 괴리
결론적으로 국제회계기준 등 회계기준의 변화는 회계가 더 이상 과거에 대한 기록자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항해하는 ‘확률론적 항해사(Probabilistic Navigator)’가 될 것을 요구하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준서의 이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실무의 현실은 ‘결정론적 확률론(Deterministic Probabilism)’이라는 기이한 모순에 빠져 있다. 겉보기에는 복수의 시나리오와 복잡한 가정을 사용하는 등 확률론적 평가의 구색을 갖추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실무 적용은 과거의 결정론적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변화보다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경영 관행과 ‘남들과 다른 것’을 리스크로 여기는 시장의 암묵적 압력이 결합된 결과다. 많은 기업들이 각자의 고유한 위험 분포를 탐색하는 대신, 시장의 평균치를 따르는 '정답 찾기'식 접근을 택한다. 심지어 그 평균치조차 실질에 근거했는지에 대한 실무적 문제도 제기된다.
결국 ‘형식은 확률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실질은 결정론’인 셈이다. 기준서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항해사의 모습과, 실무의 덫에 걸린 현실 사이의 이 거대한 괴리야말로 우리가 풀어야 할 핵심 과제이다.
3. 왜 우리는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가?: 괴리의 근본 원인
회계기준은 이미 확률론적 미래에 도착했고, AI는 그 미래를 구현할 강력한 기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회계 업계는 여전히 결정론적 과거의 강가에 머물러 있는가? 이러한 현실의 깊은 괴리는 단순히 몇몇 전문가의 무시나 무지로 치부할 수 없는, 복합적인 구조적 장벽에서 기인한다.
3.1 지적 관성의 장벽 (The Intellectual Inertia)
가장 근본적인 장벽은 수십 년간 우리 사고를 지배해 온 결정론적 회계 관행이라는 ‘지적 관성’이다. 우리는 하나의 ‘정답’을 산출하는 데 익숙하며, 스프레드시트의 셀에 입력된 단일한 숫자가 주는 안정감을 선호한다. 확률 분포, 시나리오별 가중치, 신뢰구간 등 불확실성을 내포한 개념들은 복잡하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특히 경영진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는 확률론적 추정은 객관성과 검증가능성을 중시하는 전통적 회계 문화와 충돌하며, 전문가들로 하여금 심리적 저항감을 갖게 만든다. 이는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기보다 익숙한 도구를 고수하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이기도 하다.
3.2 비용과 전문성의 장벽 (The Cost & Expertise Hurdle)
확률론적 평가는 공짜가 아니다. 대량의 데이터와 함께 IFRS 9의 ECL 모델과 IFRS 17의 리스크 모델링 등을 제대로 구축하려면, 거시경제 예측과 계량 분석에 대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전문인력의 확보와 이들이 사용할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고 복잡한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IT 인프라 구축은 막대한 초기 투자를 요구한다. 많은 기업, 특히 자원이 한정된 중소기업의 경영진에게 이러한 투자는 당장의 이익과 무관한 ‘비용’으로 인식되어 후순위로 밀리기 십상이다. 이는 전형적인 단기적 비용 절감과 장기적 가치 창출 간의 상충 문제이다.
3.3 감사 및 규제의 딜레마 (The Audit & Regulatory Dilemma)
확률론적 전환은 원칙을 현실에 적용해야 하는 감사인과 감독당국에게 근본적인 딜레마를 안겨준다. 감사인은 경영진이 제시한 복잡한 확률 모델의 수많은 가정을 검증하고 그 ‘합리성’을 입증해야 하는 현실적 부담에 직면한다. 이는 감사 실패와 소송의 위험을 높이기에, 결국 실질과의 부합 여부를 떠나 검증이 용이한 단순한 방식이나 업계 관행을 선호하게 만드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감독당국의 딜레마는 더욱 복합적이다. 감독당국이 합리적 모델과 자의적 모델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Safe Harbor)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규제 불확실성’으로 작용한다. 혁신을 의도적으로 막으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잠재적 지적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고 보수적인 경로를 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감사와 규제라는 안전장치는 본래의 취지와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회계기준이 의도한 혁신을 장려하기보다 현상 유지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4. 나아갈 길: 회계와 AI의 결합, 자기 혁명으로
앞서 진단한 장벽들이 견고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변화를 멈출 수는 없다. 핵심은 IFRS 등 회계가 요구하는 확률론적 측정과 AI라는 기술력의 올바른 결합에 있다. 둘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순간부터 진정한 자기 혁명이 시작된다.
다음 [표 1]에서 보듯이, 회계와 AI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공생 관계다. 회계는 ‘왜(Why)’와 측정해야 할 ‘무엇(What)’이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AI는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어떻게(How)’라는 강력한 기술적 수단을 제공한다. 결국 이 둘의 올바른 결합이야말로 회계 정보 가치의 퀀텀 점프를 이룰 유일한 길이다.
4.1 AI의 진정한 역할: 주인이 아닌, 강력한 조력자
먼저 우리는 AI의 역할을 올바르게 정의해야 한다. AI는 확률론적 평가를 위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AI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강력한 조력자 역할에 있다.
AI의 발전은 예를 들어 IFRS 9나 IFRS 17 등에서 시뮬레이션이나 복잡한 모델링에 필요한 방대한 연산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속도와 정확성으로 처리해 줄 수 있다. 또한, 빅데이터 속에서 인간이 발견하기 어려운 비선형적 패턴과 상관관계를 학습하여, 미래 예측 모델의 정교함을 한 차원 높여준다.
하지만 ‘어떤 데이터를 학습시킬 것인가’, ‘모델에 어떤 경제적 가정을 투입할 것인가’, 그리고 ‘AI가 도출한 결과의 경제적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재무제표에 반영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인간 전문가의 몫이다. 즉, AI는 전문가의 판단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도의 전문가적 판단(professional judgment)을 더욱 중요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회계 전문가 또한 ‘계산기’ 또는 ‘검증’ 역할에서 벗어나, 데이터와 모델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모델 설계자이자 분석가’로 진화해야 한다.
4.2 구체적 제언: 각 주체별 행동 촉구 (A Call to Action)
급변하는 AI환경 속에서 혁신은 어느 한 주체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생태계 전체의 협력이 요구된다. 특히 회계 분야의 경우 단순히 AI와 같은 기술의 도입만으로 혁신을 이룰 수 없다. 실질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형식보다 내면의 변화가 필요하다.
기업: 회계 혁신은 단순한 업무 자동화나 디지털화 혹은 최근 화두인 생성형 AI의 도입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설사 AI를 도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실질’을 명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회계정보의 생산과 이용에 있어 ‘실질’ 추구에 대한 절박함이 없다면, 단순한 AI/ML 기술만의 도입은 무용지물이다.
회계법인: AI 도입은 전통적 감사 업무의 한계를 보완하며, 어슈어런스 테크(assurance tech) 역량 강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기술적 역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 활동의 실질에 기반해 미래 예측을 위한 가정과 확률론적 평가를 중립적으로 판단하고, 이를 시장에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전문가로서의 윤리성과 독립성 강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흔들리면 전문가로서의 존재 기반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학계 및 교육기관: 회계 교육은 더욱 학제적(inter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회계 과목뿐 아니라 Python, R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 통계학, 계량경제학, 머신러닝 등을 아우르는 ‘회계 데이터 과학(accounting data science)’ 교육이 필수적이다. 더불어 전문가 윤리 교육을 병행해야 한다.
감독당국: 회계의 확률론적 평가와 미래 가정에는 단일한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업이나 감사인이 각자의 이해를 위해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감독당국은 규제의 복잡성과 해석의 어려움을 핑계로 시장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되며, 특히 중요한 회계처리에서 잘못된 적용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경우 이를 적시에 바로잡아야 한다.
5. 결론: 엔진의 시동을 걸 시간
변화의 파도는 이미 우리 발 밑까지 밀려왔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예측함에 있어 확률론적 측정을 요구하는 ‘확률론적 항해 지도’인 국제회계기준(IFRS)은 이미 우리 손에 들려 있고, AI라는 ‘최첨단 엔진’은 장착을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더 이상 지도나 엔진이 아니라, 그것을 다룰 우리의 의지와 역량이다.
회계 공동체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거대한 도전을 회피하고 결정론적 과거의 안락함에 머무르며 점차 시대적 적실성을 잃고 기술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맞이하여 정보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불확실성의 시대를 항해하는 데 필수적인 전문가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할 것인가? ‘실질’을 추구하는 경영정보 생태계의 재건 없이는 AI라는 엔진 또한 공회전할 뿐이다.
엔진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제 그 시동을 걸 시간이다. 그 선택은 바로 지금, 우리 회계 공동체의 손에 달려있다.
[1] IFRS의 경우 기준서별로 제정 시기 및 방법론의 반영 등에 차이가 있어 비교적 최근에 개정 또는 제정된 기준서인 IFRS 9과 IFRS 17을 통하여 살펴볼 것이다.
[2] IFRS 17을 많은 이들은 보험계약에 국한된 기준서라는 생각을 가진다. 기준서의 단순 문구 해석만을 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담긴 측정 기준, 측정 방법론에 대한 생각은 모든 자산과 부채의 측정과 일관된 철학과 방법론이 내재되어 있다. 장기의 금융과 보험서비스의 측정을 위한 경제학적 또는 재무적 방법론이 다른 자산과 부채의 방법론과 달라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박규서 (경영학박사, 공인회계사, 보험계리사 – 한국외대, 성균관대, 건국대 겸임교수)
(* 이 글은 '공인회계사 저널' 2025년 10월호에도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