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과 분류: 디지털자산·AI·경영이 만나는 지점
지난주 나는 금융권 실무자들과 하루 종일 디지털자산의 가치평가, 리스크관리, 회계 이슈를 다뤘다. 표면적으로는 가상자산이 주제였지만, 질문은 경영 의사결정과 연결되었고, 다시 데이터 분석과 머신러닝으로 흘렀다가, 결국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시장이 납득하는가”라는 본질로 되돌아왔다.
하루를 마치고 나서야 확신이 더 또렷해졌다. 내가 오랫동안 경영·금융·회계·계리·가치평가·블록체인·컴퓨터공학·인공지능을 함께 붙잡고 살아온 이유는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 모든 분야가 결국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향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예측(Prediction)과 분류(Classification).
경영은 자원 배분의 기술이고, 자원 배분은 미래를 전제한다. 기업은 매일 현금흐름을 예측하고, 월말 실적을 가늠하며, 환율·금리·원자재·수요의 변화를 끊임없이 전망한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세수와 지출, 고용과 산업 정책은 모두 미래에 대한 가설 위에서 굴러간다. 비영리 조직도 예외가 아니다. 지속 가능성을 예측하지 않으면 선의를 유지하기 어렵다.
그런데 예측은 홀로 서지 못한다.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분류다.
고객은 우호적인가 이탈 가능성이 큰가, 거래는 정상인가 이상인가, 프로젝트는 성공 쪽인가 실패 쪽인가. 인간은 세상을 범주로 나누고, 그 범주가 다음에 어디로 움직일지를 가늠해 왔다.
인공지능(머신러닝)이 하는 일도 결국 여기에 수렴한다.
기술적인 표현을 모두 걷어내면, AI는 예측과 분류를 더 빠르고 더 정교하고 더 큰 규모로 수행한다. “AI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말은 자극적이지만, 더 정확한 말은 이것이다.
AI는 인간 의사결정의 핵심 기능—예측과 분류—을 확장한다.
디지털자산은 블록체인이라는 낯선 형식을 두르고 있고, 탈중앙화라는 운영 방식이 얹혀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질문은 전통 금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과 조직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가.
그리고 그 판단을 위해 우리는 결국 “지금이 어떤 상태인가”를 묻고 “다음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지표다. 매스컴과 유튜브에서 자주 등장하는 MVRV ratio, NVT ratio, P/F ratio, 그리고 TVL 같은 것들.
이 지표들이 낯설어 보이는 이유는 이름이 영어라서가 아니라, 그 지표가 “무엇을 대신 말하려는지”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다.
엄밀히 말하면 지표는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현재의 상태를 설명하고(설명·진단), 과거 패턴을 해석하며(패턴 인식), 미래를 가늠하려는(예측) 도구다. 주식시장의 기술적 분석이든 온체인 기반의 정량지표든, “미래를 판단하기 위한 패턴 찾기”라는 점에서 같은 궤도에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착각이 생긴다.
지표가 많아질수록 이해가 깊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온체인 데이터가 늘고 공개되지만, 오히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가 더 어려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원시 데이터는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는 해석 가능한 구조를 가질 때 비로소 정보가 된다.
결국 문제는 ‘예측을 하느냐’가 아니라, 예측이 의존하는 입력값(정보)이 어떤 구조와 기준 위에 서 있느냐다.
디지털자산에서도 예측과 분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데이터를 설명 가능한 정보로 번역하고 검증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디지털자산이 커질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이 있다. 바로 가치평가, 리스크관리, 회계다.
이 셋은 단순한 규정 준수의 기술이 아니다. 사회가 복잡한 경제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만든 신뢰의 인프라다.
- 가치평가는 “어떤 가정 위에서 얼마로 볼 것인가”라는 사회적 합의를 만든다.
- 리스크관리는 “그 가정이 무너질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체계화한다.
- 회계는 “그 합의와 위험을 이해관계자에게 어떤 형태로, 어느 시점에,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제도화한다.
디지털자산의 세계가 ‘온체인 데이터가 다 보여준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시장은 더 취약해질 수 있다. 데이터는 많지만, 가정과 맥락과 위험이 함께 설명되지 않으면 소문과 선동에 더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표”가 아니라, 더 나은 정보 산출 체계다.
기업이 재무제표와 주석, 공시를 통해 사업을 설명하듯, 디지털자산 생태계도 자신을 설명할 언어—정확히는 설명 가능한 정보 패키지—를 갖춰야 한다.
온체인 데이터는 재료다. 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정보는 ‘구조’와 ‘검증’을 필요로 한다.
디지털자산이 어렵다고 느낄 이유는 없다. 기술의 형식이 바뀌었을 뿐, 인간의 경제 활동이라는 토대는 같다.
예측과 분류는 경영·AI·디지털자산 가치평가의 공통 언어다.
그리고 경쟁력의 차이는 ‘예측을 하느냐’가 아니라, 예측과 분류가 의존하는 정보의 구조(가정·검증·표준)를 얼마나 잘 설계했느냐에서 벌어진다.
따라서 문제는 “누가 더 큰 소리를 내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잘 설명하느냐”로 이동해야 한다.
나는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데이터를 정보로 바꾸는 산출 체계 → 이것이 예측·분류의 ‘입력값’을 표준화한다.
원시 데이터가 아니라, 가치평가의 가정·리스크 요인·회계적 표현(주석 포함)이 결합된 “설명 가능한 패키지”가 필요하다.
2. 금융기관의 역할 재정의 → 이것이 예측·분류의 ‘품질관리(검증)’를 담당한다.
수수료 경쟁이 아니라, 검증(Assurance)·위험 측정(Risk)·표준화(Standard)로 업(業)의 본질 경쟁력을 만들어야 한다.
3. 공공·민간의 목표 상향 → 이것이 예측·분류가 작동하는 ‘시장 규칙과 신뢰의 범위’를 넓힌다.
국내 시장에 갇힌 중개 경쟁을 넘어, 세계가 신뢰하는 기준과 서비스(표준·공시·검증)를 설계·수출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경쟁력은 구호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뢰의 구조에서 만들어진다.
예측과 분류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맞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이해시키는가”다.
디지털자산·AI·경영은 이미 한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수렴을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신뢰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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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서 | 경영학박사 · 공인회계사(CPA) · 보험계리사
한국외대·성균관대·건국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