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비밀이야. 알았지? “
아빠는 비밀스러운 걸 참 좋아했다. 어린 시절 엄마가 가출하면서 나에게 쥐어준 돈 3만 원을 아빠가 다시 뺏아 갈 때도, 엄마에게 비밀이라고 했다. 20대 초반 명절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려던 기차역에서 가방을 소매치기당했던 날도 아빠는 이 일을 엄마에게 비밀로 하자며 우리끼리만 알자 고했다. 그러곤 비밀스럽게 용돈을 쥐어주었다. 아빠가 급전이 필요하다며 연락이 왔을 때도, 이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사실, 엄마보다 아빠 목소리가 더 크고, 싸워도 이기는 건 아빠였다. 그러나 돈을 꾸고, 돈을 꿔주는 일 앞에서는 세상 약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돈거래를 원했던 아빠. 무엇이 무섭고, 두려워서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고 평생 그렇게 큰소리를 쳤을까?
삶의 끝이 보였을 즈음, 아빠는 미리 유언을 남겼다. 사람이 죽고 나면 여기저기서 소식을 듣고 돈 갚으라는 전화가 올 수 있단다. 빌려주지도 않은 돈인데 사람이 죽으면 확인할 길이 없으니 무턱대고 돈 내놓으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사람들 말을 믿고 절대 돈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게 유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아빠 휴대폰으로 문자와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빚독촉이었다. ‘아~ 아빠가 말한 게 이거였구나. 올게 왔구나.‘ 넘겨버리려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 꽤나 구체적인 내용으로 상환하라는 안내메시지였다. 그리고 채무자는 개인이 아닌 금융기관이었다.
아빠는 우리에게 빚을 남기고 갔다. 수천만 원의 빚은 슬픔을 원망으로 그리움을 분노로 바꿔놓았다. 하루아침에 떠안게 된 아빠의 채무! 엄마가 변제하지 못하면 나와 동생이 갚아야 했고, 우리가 못하면 내 자식이 갚아야 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과 마주했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걸 좋아하더니,, 아주 오랜 시간 아무도 모르게 이 돈을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왔을 아빠를 생각하면 분노와 안쓰러움이 뒤 섞여 혼란스러웠다. 혼자 센 척, 강한 척 소리만 잘 쳤지 세상 나약하고 연약한 사람이 우리 아빠였다는 걸 그가 남긴 빚이 말해주었다.
정신없이 서류를 떼고, 금융기관이란 기관들을 다 쫓아다니고, 변호사 사무실을 들락날락거리며 남은 가족에게 빚이 넘어오는 걸 막느라 슬퍼할 틈이 없었다. 남들은 과부가 되면 남편이 그리워 우울증에 걸린다던데, 우리 엄마는 화병을 얻었다. 화가 누그러들고 연민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 다행히도 우리는 빚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아빠의 재산을 포기하는 조건이었다.
건물 한채 가지고 있고, 주식 조금이랑 고급 자동차 한 대 정도, 아빠의 재산이 있었다면 좀 많이 아까웠을 것 같다. 적어도 엄마가 아빠의 재산을 정리하고 아들 딸에게 몇 푼이라도 쥐어 줬을 테니. 그러나 아빠의 재산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나눠 가질 몫도 없었기 때문일까? 남은 우리 가족은 똘똘 뭉쳐 이 일을 해결했다.
죽기 전까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 아빠.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빠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아빠를 이해해 보려는 일말의 노력을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빚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아빠의 유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빠를 가장 많이 닮은 나는 힘들지만 다짐해 본다.
두려움 속에 비밀을 만들지 말아야지. 나는 가족을 무서워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