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뿌려줘. 훨훨 날아가고 싶어”
아빠는 사망 한 달 전부터 본인의 장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했다. 장례지도사로 일하고 있는 사촌동생과 남동생을 불러 영정사진도 직접 선택하고 장례 후 시신처리까지 본인의 마지막을 설계해 갔다.
내 인생의 끝을 내가 매듭지을 수 있는 것도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어디에든 갇혀있기 싫다며 묫자리도 납골당도 거부했다. 그리고 의식이 혼미해지고 거동이 불가능한 상황이 오더라도 절대 요양병원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신신당부했다.
아빠는 64년 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바다의 도시 부산에서 나고 자란 아빠는 바다를 참 좋아했다. 어린 시절 몇 안 되는 기억들 중에서 아빠와 사촌들이랑 보트를 타고 해운대 바닷가에서 놀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빠는 모터보트를 자주 태워주곤 했다. 매년 여름휴가 때면 송정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모래 쌓기를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 가족은 바닷가를 자주 찾았다. 부산 사람들이 촌스럽게 해운대 가는 거 아니라고 했지만, 우리 가족은 자주 바닷가를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빠. 엄마. 나 동생. 우리 가족이 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 기울였던 날도 기장 바닷가의 한 포차였다.
“땅에 뭍지 말고 바다에 뿌려줘. 명절 때마다 찾으러 오지 말고 생각날 때마다 그냥 떠올려줘”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해양장례가 다행히 부산에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수영요트경기장에서 배를 띄워 바다장을 치를 수 있다는 걸 알고 사설 업체를 알아보았다. 비용은 대략 50만 원 정도였고, 요트 위에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고, 유골을 바다에 뿌린 후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4월 1일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3일장을 치르고 이어서 바로 해양장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빠의 유골을 받아 들었던 날 비가 왔다. 아빠도 울고 하늘도 울고 우리도 울었다.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던 아빠였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모양이다. 막상 망망대해에 뿌려진다고 생각하니 아빠도 무서웠겠지. 그럼.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저승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 그렇게 울었나 보다.
배가 뜰 수 없어서 하루 이틀 기다려야 했다. 병원 안치실에 유골을 보관하고 날씨가 좋아지면 해양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4월 5일은 한식날, 해가 눈부시게 떠올랐다.
우리는 병원으로 가서 아빠 유골함을 들고 바다장을 위해 요트 위에 올랐다. 지난밤 내린 비 때문에 바람이 쌀쌀하고 파도가 거세긴 했지만 날씨만큼은 슬프지 않았다. 요트 위에서 몇 가지 과일과 영정사진을 올려두고 마지막으로 절을 했다.
“아빠.. 그렇게 좋아했던 바다로 돌아가니까 좋지? 숨도 맘껏 쉬고, 물도 맘껏 마실 수 있고 너무 좋겠다. 이제 아프지 말고 편하게 쉬어. 맘대로 뜻대로 안 되는 인생 부여잡고 사느라 고생 많았어.. 물 흐르는 대로 여기도 갔다가 저기도 갔다가 온 지구를 여행해 아빠.. ”
바다 한가운데 요트 엔진을 끄고 멈춰 섰다. 아빠는 그렇게 파도를 따라 바람에 흩날려 멀리멀리 사라졌다. 아빠의 흔적이 사라져 갈 때쯤 우리는 육지로 되돌아왔다. 그때, 큰 벚꽃 나무 한그루가 눈에 띄었다. 남은 가족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제 아빠를 기억할 게 많아졌다.
만우절, 식목일, 벚꽃
그리고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