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이랑 계약서를 쓴 후 나는 달라졌다. 조금 특별했던 꿈을 경험했다고 해서한 사람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면 나도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변했다.
계약서는 나랑 사탄 사이에 만들어진 법이다. 언어로 써졌고 그것을 소중하게 따르려는 노력은 인생에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게 했으며 그 일에 관련된 계획이나 실행은 사소한 것이라도 아주 소중하고 꾸준히 다루려다 보니 삶 전체가 변한 것이다. 30시간 제약이 있는 섹스를 하기 위해 모든 삶을 다시 세팅한 것이다.
완전수는 짝수라고 들 한다. 지금 수학 수준으로 홀수인 완전수는 찾지 못했다고 하는데 동양철학에서도 짝수는 좌우 대칭을 염두해서 홀수보다 온전하게 섬기는 완전수이다. 여자들은 몸에 구멍이 열 개라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아홉 개로 홀수라 불완전수를 지닌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수를 지니고 있는 여자를 늘 그리워하고 부러워하며 혼자서는 살지 못한다.
2024, 시드니
인간은 짐승으로 먹고 자고 싸야 하는 욕구가 있다. 하지만 이것을 채우기 위해 보호자에게 요구하는 과정은 철저히 언어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문제는 우리가 보호자에게 기대는 시간이 지구상 그 어떤 생명체보다 오래 지속되며 그 과정에서는 우리는 그 어떤 동물보다 복잡한 언어를 가지게 된다.
배가 고픈 사람은 사실 큼지막한 버거 하나랑 칩스 몇 조각이면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버거 가게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세상 모든 버거를 먹을 거야!'라는 엄청난 요구를 쉽게 말로 한다. 그 순간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버거가 천만 개라고 한들 우리는 결국 한 두 개만 필요로 하기에 나머지 과잉은 모두 헛된 욕망이다. 그 빌어먹을 언어 때문에 우리는 채울 수도, 채워서도 안 되는 욕망을 늘 지니게 된다.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그로 인한 결핍이 있다는 뜻이다. 욕망이 가진 속성상 우리 결핍은 결코 채워질 수가 없고, 행여 채워진다고 해도 그것은 언어가 가진 특성상 바로 모습을 바꾸어 다른 욕망으로 변해 버린다. 이렇게 언어 세계 속에 사는 우리는 매 순간 채울 수 없는 구멍 하나를 가슴속에 상시값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완전수 계산값이 달라진다. 여자는 열한 개로 늘어나면서 홀수가 되고 우리 남자들이 열개가 되어 전세 역전이다. 이 결핍 존재를 깨닫는 순간 나는 구멍 하나를 더 발견하여 완전수가 되고 내 앞에 여자들은 채울 수 없는 욕망에 허덕이며 나에게 기대야 하는 존재로 보인다! 내가 완전수였다.
나는 이때부터 단순 자신감을 넘어 어떻게 여자를 공략해야 하는지 공식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사람이 가진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먼저 알아내고 내가 그 욕망 대상이 되면 게임은 끝이다. 돈도 없는 놈이 어떻게 그 욕망을 채워 줄 거냐고? 우문이지만 현명하게 답을 드린다. 그 결핍은 채워줄 필요가 없다. 아니 내가 재벌이라도 채워 줘서는 안 된다. 그것을 채워주는 순간 어렵게 알아낸 그 욕망은 다른 것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리고 여자는 날 떠나게 된다.
내가 할 일은 욕망을 영끌해서 현질로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그 욕망을 내가 채워 줄 수 있다고 상대에게 환상만 심어 주면 충분하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상대는 날 욕망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뭘 부탁해도 좋을, 내 노예가 되는 것이다.
학지사는 나에게 상 줘야 함. 심지어 나는 박영사 소속 작가인데..
임계점 1편을 쓰고 난 후에 어떻게 글을 풀어갈까 며칠을 고민하다 큰 틀에서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앞으로 나올 여주인공 캐릭터는 정신질환진단통계편람 DSM-5TR에서 증상 하나를 정한 후 그를 기반으로해서 골격을 만들고요. 여기에 살을 붙이는 것은 진단 사례집에서 실제 이야기를 살펴보고 참고하여 더욱 그럴듯하게, 현실에 있음 직한 아름다운 여성으로 만들어 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결핍을 찾아내는 것인데요. 여기부터는 정신분석 영역으로 제가 전문성은 없지만, 이 글은 시나리오를 위한 밑작업이니 대략 재미를 위주로 썰을 풀어보려 합니다. 어차피 시나리오에는 정신분석이나 DSM이야기 따위는 넣지 않을 테니 설령 제 시나리오가 극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들 영국 정신분석 학회에서 전화 올리는 없겠지요.
진단 사례집을 구매하였는데 시드니 오시는 분에게 부탁하였으니 막상 제가 받아 보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통계편람을 다시 보면서 증상을 살피고요. 관련 논문도 찾아보려 합니다.
처음에는 진짜로 사탄이 나타나서 라율이 외모를 하루아침에 공유로 싹 바꿔주는 K-드라마 형식으로 하여 미친듯이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내용도 생각해 보았으나, 다음 날 홀랑 변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기에는 호주 생활이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회사 사람들에겐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여권이랑 비자 문제 등으로 자칫 서류상 없는 사람으로 찍혀 강제 추방될 수도 있으니, 글 쓰는 제 스스로도 그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서 포기했습니다. 물론 저 정도 얼굴이면 여기서 여권이 없이도 어찌 살아볼 방도가 있겠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면 액션-애로 장르가 될 터이니 지금까지 정신분석 공부한 것이 너무 아깝습니다.
이로서 3편이 나오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양해를 미리 드리려고요. 2편은 이렇게 짧게 올립니다. 매번 변죽만 올리며 시리즈 마무리를 못해 죄송합니다. 막상 글이 나온다고 해도 뭐 대단한 것이 나올 것도 아니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