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일어나는데 밤새 들이부은 사람처럼 온몸이 젖산에 절어 물먹은 솜 꼴이다. 이렇게 피곤한 날은 무슨 꾀를 내어 회사에 핑계를 대고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 나이 탓이리라. 이리도 몸이 피곤하니 운동 스케줄을 다시 짜야한다. 무겁게 많은 세트를 하기보다는 가볍게 한 세트에 집중해서 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니 부상도 덜하고 시간도 절약되어 좋고 무엇보다 날 지겹게 괴롭히던 운동 피로감이 조금 가신다.
상사에게 깨졌다. 오후가 주는 피곤함 때문인지 잠시 방심하여 숫자 하나를 보지 못하고 멍청이 같은 소리를 했다. 그렇다고 후배 회계사들 앞에서 날 보며 한심해하는 대표님 잔소리는 서운하기만 하다. 다른 식으로 표현해도 좋으련만 꼭 그렇게 후배들 앞에서 사람 망신 주어야 속이 풀리시나? 하긴 이게 처음도 아니고 그분 입장에서는 싼 급여를 주는 것도 아닌데 회계사라는 놈이 간단한 산수도 틀리면 짜증이 날만도 하다. 상담학에서 배운대로 상대 감정에 공감하려 노력을 해본들 현실에서 끓어오른 짜증은 떨칠 수가 없다.
봉급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그 어린아이를 상자에 철저하게 가둬야 하는 일인데 나는 종종 회사에서 그 아이가 슬그머니 놀자고 나와서 난감하다. 그 아이는 꼭 이런 사고를 치기 때문이다. 고객이나 동료들 관점에서 나란 존재는 유치함을 극복한 완전한 어른 회계사여야 하기 때문이다.
테너 김재우, 피아노 변은정 교수
그렇다고 그 아이를 계속 가둬 두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아는 변호사 선배가 국장으로 있는 신문사에서 함께 라디오 방송 만드는 일이다. 고등학교 방송반 수준보다도 못한 시설에 지원도 전무하지만 내 안에 어린아이는 그래도 신이 났다.
내가 이 일을 한다는 것은 회사에는 비밀이나 아내에게는 감출 수가 없다. 퇴근 후 생활에 변동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개했지만 역시나 무척 불편해한다.
참 돈 안 되는 일 벌이는데 재주가 있어요.
국장님 목표가 이런 컨텐츠를 잘 만들어서 한국 주류 사회에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니, 두고 봐라, 내가 최욱처럼 성공해서 지금 그 한심해하는 눈빛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밤이고 낮이고 국장님 하고 방송 관련하여 전화를 하며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서로 천재, 천재!라고 극찬을 한다. 국장님도 집에서 많이 외롭다는 것을 수화기를 통해 느낀다.
국장님은 나에게 대단한 준비성에 기막힌 아이디어를 보유한 인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자 나는 다시 슬슬 충전이 된다. 그 힘으로 한동안 소원했던 삼촌에게 연락해서 칼럼을 부탁드린다. 예전에 실제로 칼럼을 많이 쓰셨고 지금도 종종 취미로 쓰신 글을 나에게 보내시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 긴 글을 제목만 확인하고 넘기는 미안함도 한 몫했다.
국장님은 작가를 찾고 삼촌은 플랫폼을 찾으니 이 둘을 연결해 주자 미친 듯이 스파크가 튀면서 양쪽 모두에게 불꽃 칭찬을 받는다. 이 일로 삼촌하고도 오래간만에 이런저런 소식을 나누며 회포를 풀고 언제 집으로 와서 식사나 하고 가라는 말씀에 감사하다고 웃으며 통화를 마친다. 삼촌에게는 어떤 근사한 선물보다도 값어치 있는 것을 드렸으니 뿌듯해지며 지난 시간 쌓였던 부채감을 모두 탕감해 버리고 자산이 쌓인다.
내친김에 주변 회계사나 심리학자들에게도 연락해서 특별 기고 식으로 칼럼을 써줄 수 있냐고 부탁을 하니 두 분이 관심을 보여서 또 국장님에게 연결해 드리자 캐스팅 천재라며 한바탕 호들갑이 났다.
드림 선생 정말 최고야, 최고!
이렇게 계속 뽕을 맞으니 이제 나는 무능한 회계사가 아니고 유능한 헤드 헌터가 된 느낌에 바닥을 헤매던 자존감이 조금씩 고개를 쳐들고, 언제 깨졌냐는 듯이 기분도 풀리기 시작한다. 이거 열심히 해봐야 신문사 좋은 일이고, 나야 시간 쓰고 돈만 태우겠지만, 교민 사회에 뭔가 좋은 일을 해보겠다는 사명감이 생기며 이 일을 해야할 이유를 역으로 만들어 간다.
이젠 내 방송 플롯을 짜자. 방송 제목은 국장님 제안으로 [시드니 도사 톡Talk]으로 하기로 했다. 정신 분석이라는 학문에 입문하려고 문을 "톡톡" 두드리는 장면을 환유시켰고 기표에서도 영어랑 한글 인접성을 찾아서 연결해 보았다. 그리고 도사라는 고리타분해 보이는 단어를 요즘 유행하는 톡톡이라는 mz단어로 젊게 만들었다.
문제는 사연자인 '도사'를 찾는 일이다. 엉뚱하지만 말도 잘하고 나름 자기 세계관이 확실해야 한다. 기왕이면 전문직이나 나이 좀 있는 분들이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주변에 회계사나 변호사 약사를 물색 중인데 오랜만에 연락해 이런 부탁을 하려니 손가락이 무안해진다.
그럼 내 안에 아이를 다시 불러 내어 대신시켜 본다. '씩씩한 네가 한번 보렴' 순진한 그 아이는 웃는 얼굴로 자신이 앞으로 당할 일이 무언지도 모르고 신이 나서 전화기 call 버튼을 누른다.
오랜만에 연락을 하니 반기는 듯하면서도 무언가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으응.. 별건 아니고 내가 이번에 한국 신문이랑 방송을 하나 같이 하려고 하거든.. 시간 되면 거기 게스트로 한 번..'
대충 이야기를 듣고 난 상대는 이게 무슨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반드시 갚아야 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아까운 시간을 내서 내 취미 생활에 들러리 서달라는 부탁에 어처구니가 없는 눈치이다.
"형, 하하.. 여전히 재밌게 사시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제가 요즘 많이 바쁘고 몸도 피곤해서요."
"아 그렇구나, 그래! 내가 바쁜 사람에게 괜한 이야기를 해가지고는.. 또 연락할게요."
이렇게 전화를 끊고 나면 그 아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뻘쭘해진 내 손가락만 얼른 추슬러 자리로 돌아온다. 하긴 이 나이에 방송 욕심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처음에 일이 잘 풀린 것이 개끗빨이구나 싶다. 이렇게 몇 번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면서 다시 어색해지기를 반복하니 더 이상은 누군가에게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나마 있던 회계사로서 내 명성에 실금도 살살 가는 느낌이다.
완장만 하나 채워주면 집안 문서도 가져다 바치는 어수룩한 아저씨 모습이 교차되며 어두운 바닥에서 힘내어 조금 기어오르던 내 자존감은 더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그건 감정이고 큰 일이다. 일은 벌였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방송을 하려면 엉뚱하고 매력 있는 도사랑 진중하면서 말을 잘하는 전문가가 여러 명 공짜로 필요하다!
그러다 오래전 소식을 접은 관세사 친구가 하나 떠올랐다.
독사가 울고 갈 만큼 지독한 짠돌이에 세상 지 잘난 맛에 사는 놈으로 같이 있으면 쏟아지는 자화자찬에 기가 빨려 모두가 피곤해하는 인간이다. 그런 성격이니 어디고 진드감치 엉덩이를 붙이지 못해 매번 직장을 구하는 인생인데 마지막으로 내가 끗발이 살아 있을 때 삼성 쪽에 사내 관세사로 넣어준 기억이 났다. 이 은혜만큼은 결코 잊지 않겠다던 카톡 맹세, 근사하게 한 턱 쏘겠다던 약속은 무색하게 양갱이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애한테까지 연락해야 하나 싶지만 지금 사람이 없다. 더구나 말빨로는 시드니 교민 사회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친구이니 어쩌면 내가 찾던 불금쇼 '경춘선'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달래며 연락해본다. 오랜만이라 연락처를 찾기도 쉽지 않았는데 문자를 남긴 지 한참이 되어서야 답변이 왔다.
녀석도 내가 보고 싶었는지 마침 우리 사무실 근처에 올일이 있다 하여 우리는 바로 만났다. 점심이나 뜯어먹고 방송에 출연시켜서 제물 삼아 마구 조롱하며 분량 뽑아 먹어야지 하는 웃음이 났다. 늘 나보다 강자였으니 죄책감 없이 놀려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코비드 이후 처음 보니 5년도 넘은 것 같다. 이 친구는 세치가 심해서 더욱 나이 들어 보였지만 그것 빼곤 모두 그대로였다.
"아이고 회계사님, 얼마 만입니까? 허허허!"
"잘 지냈냐?"
"니는 그대로다 잉?"
"뼈 부러지게 운동해서 그런가? 안 그래도 지난주에 응급실 또 다녀왔다."
능글맞은 모습에 싸우기도 많이 했고 다 커서 타지에서 만난 우정이라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는 날 기쁘게 한다. 우리가 살면서 가끔 마주하는 작은 행복감이 피어난다. 맘이 급한 나는 방송 때문에 연락했다고 털어놓고는 아주 특별한 컨텐츠라 대박 나서 한국에 역수출될 것을 기대한다고 열변을 토하니 녀석도 신이 나서 받아준다. 남 일이라면 매사에 삐딱하던 말투가, 꼭 성공할 것 같다고, 어인 일로 내편이라 수상했다.
한국 가곡의 밤, Sydney Conservatorium
"근데 어찌 지냈냐?"
"내? 좀 아팠다 아이가. 니 장가 갔다문서?"
"아팠어? 너 아직 삼성 다니니?"
"아파서 그만두고 한국에 가족 데리고 갔다가 몇 달 전에 들어왔다니."
"아, 그래. 애기 많이 컸겠다."
"벌써 열 두 살이고. 니는?"
"와, 다 키웠네. 난 없어.."
그렇게 저렇게 좀 힘들었다는 녀석 말에 놀려 먹으려고 했던 계획이 갑자기 가셨다. 반대로 녀석은 아이 이야기를 했다가 무안해졌는지 우리는 서로 잠시 말이 없다. 아프고 나서 일자리도 없이 힘들다고 웃는 녀석을 보니 뜯어먹기는커녕 또 내가 계산하고 만다. 커피를 사겠다고 했지만 어쩐지 그만 기운이 빠진 나는, 점심시간 끝나서 들어가야 한다고 둘러대고는 다음에 또 보지 뭐, 어깨 툭치고는 사무실로 들어왔다.
눈물 한 방울 없을 것 같던 지독한 전문가 얼굴을 기대하고 만났는데 이제 후덕한 아저씨가 된 녀석 얼굴을 보니 무슨 말도 하기 힘들어서 방송이고 뭐고 다 귀찮아졌다. 선하게 바뀐 녀석 눈매가 오히려 거슬리는 날이다. 에이, 하필이면 그 독함은 다 어디 가고..
친구를 보내고 내 안에 그 아이는 다시 홀로 된다. 그리고 나는 현실 속 무능력한 회계사로 돌아와 잠시 내 못남을 감출 핑계로 글을 쓰고 방송을 구상하고 사람을 만나며 행복하던 3일을 돌아본다. 방송이 대박 나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되겠지만 우리 방송은 그냥 몇 명이 듣다 마는 그저 그런 전파 모음이 되고 말 것이다.
유명세가 있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는 개인이 엄청난 진행 능력을 가진 프로도 아니며 무엇보다 이미 시장에는 사활을 걸고 진심으로 절실하게 이런 방송을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재능도 재미도 절실함은 이기기 힘들다.
대부분 작가나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 안에 남들이랑 다른 어떤 뛰어난 공상이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도 내가 그리는 환상이 남들보다 더 아름답다는 근거 없는 자부심이 있는데 지난 일 년 열심히 다시 글을 써보고 기적처럼 출간하는 기회도 얻었지만 시장 반응이 이렇게 차가운 것으로 보아 나야말로 망상가이더라.
영화는 영화다, 2008, 장훈
그러니 일상을 떠나 환상에 젖어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개수작은 그만 접어야겠다. 잘 나가던 조폭 두목이 그만 그 일이 지겨워 젊은 시절 꿈꾸던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헛된 망상을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영화가 요즘 순간순간 뇌리를 치고 간다.
송충이는 솔잎을, 회계사는 수수료를 먹고살아야지. 정신 차리자. 단순하게 주어진 내 행복만 좇는 그런 현명한 회계사가 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