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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유물론자

유물론은 아무나 하나

by DreamHunter

주변 어른들이랑 가끔 식사를 해보면 당신께서 젊어 취미 생활 진득하게 하나 하지 못한 것이 후회로다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악기나 무술 하나는 섭렵했으면 지금 나이에도 Master 칭호 하나쯤 받을테니 얼마나 좋을까 후회하시는 분들 말이죠. 맘 속 같아서는


어르신 지금이라도 시작하시면 됩니다. 오늘도 시작 못하시는데 어떻게 불가능한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에서 시작하려 하십니까?


이런 개싸가지 없는 조언이 튀어나와도 참습니다. 아무리 제가 까칠한 놈이라지만 그 정도로 사회화가 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시합 준비로 더 피폐해진 몸


취미로 시작한 유도는 이제 개인 사업자를 넘어 회사로 운영 중입니다. 작은 규모지만 나름 돈 놓고 돈 먹는 서비스 업이라 피가 마르고 뒤통수 앞통수 매일 깨지는 막장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고객들이 세금 많이 나왔다고 칭얼거릴 때면 은근히 짜증도 나고 돈을 벌었으니 내야지, 그럼 사업 망해서 세금 안내야 기쁘시려나 했지만 막상 내 사업을 해보니 저도 죽는소리가 절로 나오며 그때 고객들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아이를 키워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꼰대 조언처럼,


자기 사업을 해봐야 회계사도 진짜 회계사가 되어 갑니다.


호기롭게 시작한 사업이지만 천군만마를 데리고 오겠다던 후배는 잠적했고; 새도장 언제 오픈하나며 끈질기게 조르던 회원들은 모두 잠수; 여태 스폰서를 해주던 은행도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개업식에 맞추어 새로운 이사장님 취임하면서 동업 계획서는 전면 재검토로 들어갑니다. 마치 세상이 나를 지켜보다가 고난을 주려고 작심한 것인가 싶을 정도라, 욥기에 나오는 욥 심경이 이런 것인가 싶습니다.


거지가 된 재벌 욥


10년을 형동생 하던 동업자는 이런 마당에 손해를 안 보겠다고 회원을 빼돌려 자기 주머니를 챙기니 세상이 정말 살벌하구나 인생도 배웁니다. 정신분석을 아무리 공부하고 한때 관상도 연구했으며 충분히 사람을 겪어서 안다지만 현실은 책이랑 다르더군요.


이런 고난이 오니 불태울 쓰레기들은 삶이 주는 고강도 열기에 다 타버리지만 내 주변에 숨어 있던 황금들은 검은 잿더미 위에서 빛이 납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그 작은 황금 덩어리 몇 개를 기반으로 사업은 다시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욥이 거지가 되었다가 시험을 통과하자 야훼가 갑자기 복을 불어넣으니 더 큰 재벌이 되었다는, 해피앤딩으로 가는 과정이 생략되어 늘 궁금했는데 이렇게 고난 끝에 복도 알아서 오는 것인가 싶네요. 물론 저는 갈길이 멀지만요.


노름이나 마약을 해서 망가진 인생은 논외로 하고, 삶이 주는 고난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면서 인성을 더욱 검소하게 바꾸고 주변에 있는 가면들 중에 종이가면이랑 황금가면을 구별해 줍디다. 약한 불에도 다 타버리는 얄팍한 종이 가면을 뒤집어쓴 자들을 마주함에 씁쓸하고 평소 밥맛 떨어진다 생각했던 사람들 중에 의외로 황금 가면을 쓰신 분들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요.


누구나 시련이 오면 종이 가면이랑 황금 가면을 마주하게 되나, 범인들이랑 대인배가 다른 점은, 오늘 평가 결과만 가슴에 품고 영원히 가는 경우랑 어떤 가면이라도 버리지 않는 차이입니다. 대인들은 귀하게 다루는 가면은 따로 있지만 그렇다고 굳이 시간 들여 종이가면을 찢는 일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황금 가면도 영원하지 않고 지금 종이 가면이라도 어느 순간에는 내게 황금 가면이 된다는 것이 진리이자 성공하는 열쇠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날뛰면 큰 사업은 고사하고 인간 관계도 난항을 겪게 됩니다. 촉나라 유비처럼 자기 속을 끝내 감추고 화내지 않는 사람이 이깁니다. 촉이 멸망한 것도 (삼국지연의 이야기지만) 유비가 막판에 관우 죽음으로 평정심을 잃고 갑자기 급발진해서 박살이 나고 부터라지요.


장은실 선수도 선택한 아디다스 골드 챔스, 11만 5천 원

호주에서 구할 수 없는 주짓수 도복이 있는데 마침 회계사 선배 한 분도 이걸 맘에 들어하셔서 찾다 보니 한국에 아주 저렴하게 나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더 이상 도복은 살 수 없다는 기조이고 더구나 자기 선물은 매번 잊으면서 선후배들 선물이 어인 말이냐며 절대 한국 돈을 풀 수 없다 하여 고민이 깊었습니다. 이러던 차에 마침 친구가 연락이 옵니다.


인간아, 언제 한국 오니?

곧 가. 아! 맞다. 부탁 하나 하자. 주짓수 도복 두 벌만 사줘. 두 개 23만 원인데 내가 가서 돈줄께.


이러자 갑자기 대화가 끊깁니다. 그리고 짜증 섞인 말투로 그런 족보도 없는 웹사이트에 돈 보냈다가 물건 못 받으면 나더러 책임지라고 또 지랄할 거 아니냐기에 그럴 수도 있는가 싶어서 그 회사에 연락하고 총판을 담당하는 과장님이랑 알게 됩니다. 과장님 소개로 이런저런 사업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 주짓수 총판 관장님을 또 소개받아서 이번 체전에 만나기로 했고요. 이렇게 일이 해결되었다니 친구는


아, 이 새끼 말 진짜 못 알아듣네..

돈부터 보내 인마.

너는 어떻게 기생충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돈이나 빌리고 가까운 사람들을 힘들게 하냐.


사이트 위험성을 말한 것이 진짜 그런 걱정 때문이 아니고 내 부탁이 싫어서 둘러댄 핑계였다니 너무나 창핑해지고 친구에게는 미안하다 내가 괜한 부탁을 했구나 사죄했지만 이제는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30년 지기를 잃다니 좀 황망한데 이 스토리를 아는 다른 친구가 그까짓 거 내가 사준다며 이번 일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도 마무리된 것이 없습니다. 도무지 이해 못 할 부분이 있어 이 썰을 풀면 주변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입니다.


1. 살면서 안 주고 안 받아야지 왜 그런 부탁을 하냐

2. 30년 지기인데 2천만 원도 아니고 20만 원을 가지고 그럴 수 있느냐


제가 듣고 싶은 말은 이미 몇 번인지 정해져 있기에 1번을 거론하며 다시 저를 타박하는 사람은 그 친구랑 같은 카테고리에 분류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친구 일화가 짧은 것은 아니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한 번씩 꺼내 봅니다. 그리고 반응에 따라서 응당 취급하고요.


환상 속에나 있다는 진짜 친구


스스로는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라고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아직도 어딘가에 있다는 진정한 친구, 신화 속에 나오는 그 남자를 찾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피 흘리는 돼지를 싸가면 묻지도 않고 자다가 일어나 삽 들고 빨리 따라오라며 앞길 서는 그 사람 말이죠.


내가 그럴 수 없는데 나는 그런 친구를 원합니다.


그런 친구는 세상에 없지만 저 동화를 만든 사람도 저도 그런 친구를 그리며 환상 속을 헤매고 그러지 못하는 내 주변 친구들을 욕합니다. 살인 동조 죄를 불사하고도 친구를 믿어주는 자가 세상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막상 그런 사람은 또 다른 살벌한 증상이 있거나 내게 그 이상을 요구하려니 있어도 제가 담지 못합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은 없이 어린 시절 추억을 인질로 나를 위해 살인 공모도 할 친구를 꿈꿔 본다는 것이 나는 유물론자는 전혀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내 맘에 쏙 드는 그런 친구란 종교 설화나 신화 속에나 존재할 테니까요.


30년 지기랑 바꾼 도복

프로이트 선생님은 철저한 유물론자이며 무신론자이지만 저에게는 그가 다시 신이 되고 그가 말하는 이론이 이상향이 되어서 유신론 재료로 쓰입니다. 저야말로 프로이트를 곡해하는 자이고 잘못 사용하는 사람 중에 가장 앞줄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빡빡한 세상을 살면서 내가 피신한 곳을 정신분석이고 내가 아버지로 삼고 싶은 사람은 프로이트입니다. 지난 글에서 논의한 근친에 대한 논의를 나름 풀어 보았습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 핵심이라는 근친 욕망이 이상하다는 취지였는데 지난 며칠 설마 프로이트 선생님이 내가 지적한 것을 모르셔서 그랬겠나 하는 마음에 다시 보니 제 글이 틀렸습니다. 우선 가정은:


1. 인간은 근친을 피하는 것이 기본 값이다;

2.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근친을 한다;

3. 유아도 성인 같은 성욕이 있다.


처음 두 개는 누구나 동의하는 바이지만, 3번 프로이트 핵심 주장은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분들(가령 칼 G. 융)이 생각보다 많아서 정신분석을 포기하는 문턱이 됩니다. 아쉽지만 그런 분들은 다른 쪽으로 가셔야겠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정신분석 공부를 시작할 수도, 프로이트 무의식을 인정할 수도 없으니까요. 우선 창세기에 근친 장면으로 유명한 롯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30 롯은 소알에 사는 것이 두려워서, 두 딸을 데리고 소알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서, 숨어서 살았다. 롯은 두 딸들과 함께 같은 굴에서 살았다. 31 하루는 큰 딸이 작은 딸에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아무리 보아도 이 땅에는 세상 풍속대로 우리가 결혼할 남자가 없다. 32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께 술을 대접하여 취하시게 한 뒤에,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서 씨를 받도록 하자.” 33 그날 밤에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한 뒤에, 큰 딸이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서 누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 딸이 와서 누웠다가 일어난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창세기 19)


이처럼 극악한 상황에서는 인간도 개도 근친을 피하는 본능이 깨지면서 근친을 욕망하게 되는데요. 우리 인간은 어려서부터 성욕이 있기에 언어를 배우기 위해 무지막지한 시간을 보호자 품에서 보내며 근친 선호로 돌아섭니다. 즉 언어를 배우는 그 시간에 우리는 근친 거부 본능이 망가지는 것이죠. 만약 우리도 태어나서 바로 짐승처럼 풀어 키운다면 근친 욕망이 없을 것입니다. 대신 언어가 문신되지 못하니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 같은 모습으로 살게 되겠지요.


인간이 만약 챔팬지 무리에서 자라게 된다면 그들처럼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프로이트 이론은 제 마음속에서 잠시 이탈했던 궤도를 찾아갑니다. 프로이트는 다시 제 마음속에 신이 되고 그가 쓴 텍스트들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는 성서로 자리하고요. 스스로를 돌아보니 사람들 앞에서 유물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시 유물론이라는 환상에 취해 사는 유신론자였습니다.


진짜 유물론자들은 그런 자기소개 따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람


프로이트 선생님은 어쩌면 제 친구 같은 부류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친구를 위해 같이 시체를 매장하러 가실 양반은 아니죠. 그런 환상주의자는 아닐 거예요. 프로이트 선생님을 직접 관찰한 기록에 보면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저처럼 오지랖 떨고 우정이라는 유치한 이름으로 설레발치는 분은 절대 아니기에 행여 저랑 마주했다면 우리는 분명 서로를 극혐 했으리라 또 상상을 해봅니다. 유물론자들은 절대 하지 않을 쓸데없는 상상 말이죠.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검은 도복에 부착할 검은 패치 특수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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