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로 통하는 하나의 문
의심과 불안, 염려와 걱정, 비판과 정죄, 이 모든 것들은 마음의 영역이다. 그런데 믿음은 그런 마음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그런 마음들이 있음을 알지만 믿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더 큰 선을 의지하고 자기 안에서 주장하고 맞다고 여기고 있는 마음과 생각들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를 포기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해야만 한다. (참고로 여기서 마음과 자기를 나는 에고로 본다.)
그리고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Doing의 영역이 아니라 Being의 영역이다. 뭔가 자기가 어떤 일을 잘 해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어떤 도덕과 신념을 지키고 선을 행한다고 해서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믿음은 그냥 존재하기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래서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은혜라고 한다. 또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킬 때 믿음이란 표현을 쓰기에 물질세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믿음이 어렵고 애매하기만 하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이란 단어는 일단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누군가가 누구를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그 대상이 있다. 특별히 기독교에서 사랑과 공의의 신과의 관계를 처음 맺을 때 믿음이란 표현을 쓴다. 전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성경에서 미리 계시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을 보지 않아도 믿기로 결정하고 받아들이면 믿음의 관계가 시작된다. 이렇게 믿음으로 시작하면 믿음 자체가 존재의 영역이기에 그 세계의 문이 바로 열려 신의 평안을 맛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으로 시작했어도 오랜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선하다고 하는 행위들(예배, 기도, 섬김, 구제 등)로 익숙해지게 된다. 그러면 어느덧 믿음은 희미해지고 성스러운 존재의 영역이 아닌 마음과 행위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성스러운 행위들이 모여 마음과 신념으로 가득 찬 영적인 에고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 안이든 밖이든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지나 정작 본인이 옳다고만 여기는 아집쟁이가 되어 버린다. 선악의 극단적인 구별과 분리는 또 다른 상처와 고통들을 생산해 낸다.
그러면 다시 믿음의 영역으로 초대가 시작된다. 이 또한 자신과는 별개로 순전히 선물처럼 주어진다. 그 초대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냐 아니냐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본인의 의지이고 알아차림이다. 영적 에고이든 아니든 또 다른 형태의 에고가 만들어 내는 고통들과 허상들을 인지하고 다시 존재의 영역으로 가고자 하는 지속적인 지향만 있다면 그 길은 열린다. 하지만 이때 그동안 자기 자신이라 여겼던 에고가 아닌 믿음을 선택할 용기도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큰 고통 속에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가기도 한다. 새로운 자신이라 여겼던 영적 에고까지 죽는 좁은 문을 결국 통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