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고 나서
우리는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을 자주 평가한다. 그 사람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하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내 생각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며 화를 내가면서 잘못된 것을 고쳐주려고 시키지도 않은 노력을 다한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해서는 남에게 하듯이 나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평가를 하는가? 만약 평가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할 것인가?
이집트에는 사람이 죽으면, 죽음 이후의 관문에서 신은 두 가지 질문을 한다고 한다.
이 두 질문에 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후의 길이 달라진다는데, 그 질문은 이러하다.
첫 번째 질문은 ‘남을 행복하게 했는가?’이고, 두 번째 질문은 ‘자신의 행복을 찾았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두부류로 나뉘게 된다. 남을 행복하게 해서 나의 행복을 찾느냐? 아니면, 내가 행복해져서 남을 행복하게 하느냐?이다. 다시 말해, 전자의 경우는 남의 행복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나의 행복에서 남의 행복을 찾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한 삶이라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다수의 사람들이 나의 행복부터 찾아서 행복한 삶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김영민 교수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는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의 삶을 평가할 때 적용되어야 할 평가기준에 대해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사회적 명예를 누렸느냐, 누가 오래 살았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근본적인 평가기준은 누가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주고 있다.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면 나의 경우에는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과 나눔을 많이 하여 그들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것이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세상에 선행을 많이 전하였으면, 내가 이 세상의 흙이 되었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들이 또 다른 이에게 선행을 전해줄 때, 나를 한 번 더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내 존재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다. 마치 사랑을 실천한 마더 테레사를 잊지 못하는 우리들처럼 말이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거리마다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종소리를 들으며 나의 주머니에 있는 작은 돈들이 이 추위에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나의 따뜻한 마음이 전달된다면, 내 마음 또한 훈기가 가득해진다. 이렇게 작은 선행부터 하나씩 실천하다 보면 나의 좋은 인생의 이야기는 차곡차곡 쌓이게 되어 하나의 따뜻한 책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나의 마음에 욕심들이 사라져 마음이 넉넉하게 된다. 선행은 전염성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넉넉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내손에 땡전 한 푼 없어도 부자가 된 느낌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겐 소중한 사람들이 항상 곁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아야 인생의 참맛을 깨닫게 된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객관적으로 나의 지나온 삶을 바라보며 평가해야 기준을 만들 수 있다. 아직 죽음은 멀리 있다 생각하여 생각 없이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고요한 아침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삶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 유한한 삶에 감사하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은 매우 값진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이집트에는 죽기 전에 두 가지 질문을 하는 것 같다. 넉넉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남의 행복에서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있고, 그들만이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의 삶을 평가할 때, 적용되어야 할 평가기준은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선행을 실천했는가?이고, 이 평가기준으로 나는 삶을 멋지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