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도시에서 찾은 온기

하얀 도화지 위로 던져진 첫 발자국

by 꿈꾸는 담쟁이

비행기가 신치토세 공항에 내려앉는 순간, 창밖은 온통 순백의 세상이었다. 38살의 겨울, 나는 남편 그리고 소중한 친구 부부와 함께 일본 홋카이도의 심장, 삿포로에 도착했다.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떠나온 이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라기보다, 작가로서의 감각을 깨우고 삶의 여백을 채우는 과정이었다.



우리위 숙소 '도미인 프리미엄 삿포로'. 추운 날씨 속에서도 매일 밤 뜨끈한 온천에 몸을 담글 수 있다는 안도감이 여행의 시작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1일차: 예술과 미식의 조우

삿포로에서의 첫 일정은 나의 직업적 본능을 깨우는 '홋카이도 도립 근대 미술관'이었다. 차가운 공기를 뚫고 마주한 미술관의 작품들은 홋카이도의 거친 자연과 닮아 있으면서도 섬세했다. 교육 아티스트로서 아이들에게 전달할 새로운 시각적 영감을 수집하며, 이곳의 정취를 마음껏 들이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삿포로에 오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스프카레'로 첫 끼니를 해결했다. 진한 국물 속에 통째로 들어간 구운 채소들은 입안에서 저마다의 향을 냈고, 추위에 굳었던 몸을 금세 녹여주었다. 저녁에는 삿포로 TV 타워에 올라 도시의 야경을 감상했다. 화려한 불빛들이 눈 위에 반사되어 마치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풍경은 잊지 못할 첫날의 선물이었다.



2일차: 여행 중에도 멈추지 않는 '기록자의 삶'

둘째 날은 삿포로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맥주 박물관으로 향했다. 붉은 벽돌 건물이 주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셔터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친구 부부와 함께 시원한 맥주 샘플러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는 시간, 그것이 바로 여행의 묘미였다.

오후 5시, 우리는 노르베사 대관람차에 올랐다. 사실 이 시간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저녁 7시 30분부터 예정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도 나의 학생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관람차 안에서 내려다본 삿포로의 노을은 그 수고로움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수업을 마치고 밤 9시 30분, 미리 예약해둔 징기스칸 식당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지글지글 익어가는 양고기와 시원한 맥주 한 잔은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블로그 코치'로서 이 맛있는 순간들을 어떻게 기록할지 머릿속으로 타이틀을 그려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3일차: 비에이와 후라노, 비현실적인 순백의 세계

셋째 날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비에이·후라노 버스 투어였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위에 홀로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자연의 고독과 강인함을 동시에 느꼈다. 켄과 메리의 나무, 세븐스타 나무... 이름 붙여진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나는 '꿈꾸는 담쟁이'라는 나의 닉네임을 떠올렸다. 척박한 벽을 오르는 담쟁이처럼, 이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는 나무들의 생명력은 예술가인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4일차: 오타루의 낭만과 마지막 밤

네 번째 날은 기차를 타고 오타루로 향했다. 영화 '러브레터'의 감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운하를 따라 걸었다. 낮에는 아기자기한 오르골당의 멜로디에 취했고, 점심으로는 신선한 스시를 맛보며 미각의 호사를 누렸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오타루 운하는 가스등 불빛으로 황홀하게 변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가 나란히 걷던 그 길은, '함께'라는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밤늦게 돌아온 숙소에서 남편과 함께 보이차 한 잔을 나누며 이번 여행의 조각들을 맞춰보는 시간은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에필로그: 다시 일상으로, 그러나 다른 시선으로

4박 5일의 짧고도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캐리어에는 선물보다 더 묵직한 영감들이 가득 찼다. 삿포로의 눈은 단순한 결정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온기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이었다.


이제 나는 다시 에세이 작가로, 코치로 내 블로그라는 일터로 출근한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삿포로의 하얀 눈밭과 그곳에서 나눈 웃음소리가 이정표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 삶이라는 하얀 도화지 위에 삿포로의 기억을 한 방울 떨어뜨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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