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늘 조용한 날에 머문다
* 매주 목요일은 마음을 따라 문장을 옮기고, 문장 사이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한 권의 책이 맘에 들 때(지금은 그것이 벤의 서간집이다)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중략)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특별한 날들이 먼저 떠오를 줄 알았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나 무언가를 이루었던 날처럼 의미 있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음을 따뜻하게 적신 건 아주 소소한 순간들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부엌 창을 넘어올 때, 창밖으로 조용히 해가 떨어질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혼자 걷던 오후,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이 터졌던 친구와의 대화 한 조각. 그런 평범한 일상들이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가장 깊은 행복은 오히려 ‘아무 일 없던 날’에 머물러 있다. 커다란 이벤트도, 특별한 성취도 아닌, 그저 조용히 흘러가던 하루의 작은 기쁨들이 오랫동안 살아 있는 기억이 되어 내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일 만큼 반짝이고 누구에게나 자랑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해야만 행복이라 믿었던 시간들.
하지만 진짜 행복은 늘 조용히 그러나 깊이 내 곁에 머물고 있었던 것 같다.
작은 기쁨에도 웃을 줄 아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짜 ‘행복을 느끼는 능력’이 아니었을까.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거든요.
그러니 감사해 주세요.
—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 중에서
자연 속을 천천히 걷다 보면 공기 속에 스며든 상쾌한 내음과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 흙냄새와 햇살이 뒤섞인 온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그 순간, 이게 바로 살아 있다는 감각이구나 하고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억지로 쉬던 숨이 아니라 진짜 숨을 쉬는 느낌. 폐 깊숙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비로소 내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 짧은 순간 세상은 더 이상 바쁘게 흘러가지 않는다. 마음은 고요해지고 나는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오롯이 느낀다. 이런 순간을 놓치고 그저 흘려보내는 삶이라면 그건 얼마나 아까운 일일까. 살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아름답고 선명한데 말이다.
그렇게 마음이 깨어나는 걸 느낄 즈음,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도 나를 다시 일상으로 데려다주었다. ‘먹방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떠난 짧은 하루.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해 온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하며 우리는 또 한 번 평범한 행복을 되새겼다.
기차에 올랐다. 지역이 달라 나는 벌써 한 차례 벚꽃을 보냈는데 그날 찾은 곳에서는 다시 벚꽃이 피고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한 번 더 준비해 준 듯한 봄. 예상치 못한 장면 앞에서 나는 숨을 멈추고 고요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흐른다. 우리가 억지로 거스르거나 부정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제 역할을 하며 계절을 잇는다. 봄은 봄의 얼굴로, 바람은 바람의 몸짓으로 우리 앞에 다가와 준다. 그래서 고맙다. 찾아가면 언제나 만나게 되는, 오래된 친구처럼 그 자리에 있어 주어서.
어느덧 사십 대가 된 우리는 이제 “건강이 있어야 진짜 행복할 수 있다”는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인다. 젊은 날에는 꿈과 미래를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오늘 하루의 무탈함에 감사하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는 시기다. 친구들의 소소한 이야기와 웃음 속에서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게 고마웠다.
아무리 바쁘게 살아왔더라도 때때로는 잠시 멈춰 서서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숨 쉬고 있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무사히 살아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귀하고도 놀라운 일인지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산다.
건강은 늘 곁에 있는 듯하지만 어느 날 문득 사라질 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주변의 이야기에서 혹은 가까운 이의 아픔을 통해 알게 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 란 그 말을 곱씹어 본다.
지금 이 순간,
아무 탈 없이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는 것.
그 무엇보다 따뜻한 사람들과 웃을 수 있다는 것.
때때로 자연을 마주하고,
다시금 숨을 깊이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이미 충분히 커다란 행복이었다는 것.
물음 앞에서 우리는 조금 더 조용해지고
조금 더 천천히 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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