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들

by 꿈꾸는 나비


이 생각의 출발점은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봄날은 간다」라는 꼭지였다. 이 꼭지를 먼저 골라 읽은 건 사실 대단한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이유라면 아주 사소했다. 나의 '18번'이라 부르기엔 조금 쑥스럽지만 노래방에 가면 아주 가끔, 아무 생각 없이 고르던 노래가 바로 그 제목이었으니까.


책의 목차에서 그 제목을 보자마자 별다른 고민 없이 페이지를 펼쳤다. 역시나였다. 황현산은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를 인용하고 있었다. 제목만 빌려온 것이 아니라 노래가 품은 정서의 결을 글의 문장으로 끌어와 놓은 느낌이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책을 읽다 말고 아주 오랜만에 그 노래를 틀었다. 늘 그랬듯 멜로디보다 가사에 집중한다. 그렇다고 한 줄 한 줄을 해석하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노래를 듣는 동안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이 먼저 고개를 드는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것들을 떠올릴 때 생기는 미묘한 체념들이 일어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마음 같은 것들이 사이 사이 숨어든다.


“가만히 눈 감으면 잡힐것 같은 /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아름다움과 슬픔이 한 몸이라는 이 자명한 사실을 피고 지는 꽃들의 숙명으로 비춰본다. 아름다움이 필연적으로 데려오는 슬픔에 대한 긍정을 노래하는 이곡은 내게 묻는 듯했다. 왜 우리는 끝나가는 것 앞에서 이토록 무력해지는지 사라진 시간보다 남아 있는 시간을 붙잡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운지.


언젠가는 가사를 매개로 글을 쓰게 될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노래를 분석하거나 의미를 해설하는 글은 아니길 바랐다. 오히려 가사 하나에 툭, 하고 걸려 넘어지는 순간. 그 감정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가는지를 끝까지 따라가 보고 싶었다 내 감정은 매번 달라지고 있었다. 가사는 그대로였지만 내가 서 있는 삶의 위치가 달라질 때마다 노래는 매번 다른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어떤 날엔 구름의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계속」을 들으며 내가 무엇을 ‘계속’이라 부르고 있는지 되물었다.


“조금씩 불안하던 마음에 덧칠을 하는 게 /

나도 모르는 순간인 게 너무나 아프고”


불안 위에 불안을 덧칠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 ‘계속’이 미련한 관성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겠다는 지독한 의지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밤이 있었다.


또 어떤 밤엔 검정치마의 「Antifreeze」를 들으며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도 결코 얼지 않는 온도를 생각했다.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

바다 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차갑게 식어버린 줄 알았던 마음이 사실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녹으며 절망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한다. 이렇게 노래는 늘 설명보다 먼저 감정을 불러냈고 나는 그 감정의 뒤를 한 박자 늦게 따라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감정을 너무 자주 느끼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거의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간다. 불안하면 없애려 하고, 무기력하면 스스로를 책망한다. 감정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문제'처럼 취급된다. 그러는 사이 감정은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대신 몸과 일상에 짙은 흔적을 남긴다.


이런 생각들이 모여 결국 ‘이 시대를 살아내는 감정 사용 설명서’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노래 한 곡 앞에 잠시 멈춰 서는 일은 내밀한 감정들을 다시 불러내는 가장 사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이 생각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한 권의 책에서 발견한 익숙한 노래 제목, 오랜만에 다시 들은 노래, 그리고 그 감정의 꼬리를 놓치지 않으려 적어 내려간 아주 조용한 밤에서 시작되었다.


다시 노래를 들으며 나에게 묻는다.


“이 감정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 걸까.”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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