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보 전진과 6보 후퇴, 닫힌 순환 속의 우리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by 꿈꾸는 나비

이번에는 처음으로 소설을 메모해 가며 읽었다. 등장인물 이름을 적어두고, 헷갈리는 관계를 정리하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중간중간 멈춰서 생각을 붙잡아보는 식으로. 사실 발제를 준비해야 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막상 그렇게 읽고 보니 이 소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 들여다보게 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게 무슨 이야기지'보다 '이 사람들은 왜 이럴까를 더 오래 붙잡고 있었다.


1부 2장의 긴 호흡에 막혀 초반 몰입이 쉽지 않아 고전하기도 했지만, 막상 그렇게 연필을 들고 읽기 시작하니 이 소설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텍스트 너머의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는 그 진흙탕 속에 처박힌 사람들을 돋보기로 관찰하듯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렇게 읽다 보니 이 소설은 읽는 동안보다 읽고 나서 내 몸에 더 오래 들러붙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 독서모임은 정답을 찾기보다 각자가 어느 대목에서 발이 푹 빠져버렸는지를 ‘툭’ 꺼내놓는 시간이었으면 했다. 이 방대한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나는 '빠져나올 수 없는 거미지옥 같은 굴레'라고 말하고 싶다. 읽는 내내 어딘가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기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도는 기괴한 감각에 시달렸다.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삶이 나아질 것 같아 필사적으로 움직이지만 막상 도착해 보면 또 다른 진흙 위였다. "길 위의 웅덩이를 피해 가려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다 보니 자꾸만 웅덩이에 발목이 빠지고, 신발 속에선 진흙이 욱적거렸으며, 외투는 갈수록 무거워졌다(p.105)"는 묘사처럼 이리 가도 저리 가도 결국 풍경은 똑같았다. 찝찝함과 답답함 속에서도 끝까지 읽게 되는 건 인간의 욕망과 위선이 너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져 있어서, 불편해 미치겠는데도 눈을 뗄 수 없는 블랙코미디 같은 씁쓸함 때문이었다.


소설의 구조인 '6보 전진, 6보 후퇴'는 탱고의 스텝에서 따왔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이 세계의 '물리 법칙'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절망적인 세계. 우리 삶도 열심히 발을 놀리고 있는데 문득 뒤돌아보면 작년과 재작년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서늘함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소설 속 탱고는 즐거운 유희가 아니라 결코 멈출 수 없는 저주받은 리듬이었다.


비는 멈추지 않고 내리고, "움직일 때마다 풍겨 오는 생선 비린내 같은 냄새(p.52)"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풍경은 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이 처해 있는 '상태'였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종소리는 어떠한가.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음향이 마치 오래전에 상실하고만 희망의 선율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p.389)." 종소리는 실재하는 신호라기보다, 지금까지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p.391)처럼 느껴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희망의 잔향 같았다. 이미 사라진 것을 붙잡고 싶어서 스스로 만들어낸 가짜 신호 말이다.


인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마음은 이리미야시, 에슈티케 그리고 후터키에게 머물렀다.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해 군림하며 "여러분은 모두 무죄입니까"라고 묻는 이리미야시를 보며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에 속이 끓었고, "죄책감이란 한 번 혜성처럼 작열하고 나면, 이후엔 여명처럼 희미한 의식의 불편함 정도만 남기는 것이다(p.123)"라는 헐리치의 말처럼 도덕적 감각조차 무뎌지는 현실에 씁쓸해졌다.


가장 순수했기에 가장 비극적인 선택을 한 에슈티케의 죽음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는 세계에서 일어난 조용하고 무력한 사건이었기에 더욱 아프게 남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나를 붙잡은 건 역시 후터키였다. 독서모임에서 문하연 작가님이 "이 책의 주인공은 누구일까"라고 묻는 순간, '아, 후터키구나!' 하고 탄성이 터진 것도 그 때문이다.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건 정의가 아니야. 정의는 없다고(p.361)"라고 자조하면서도, 스스로를 "길 잃은 양처럼 여기 서 있구나(p.270~271)"라며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그의 뒷모습이야말로 이 지독한 사탄탱고의 리듬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진짜 주인공 같았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이 진흙탕 마을에 살았다면 어떤 인간이었을까?' 예전의 나라면 아마 희망이라는 뜬구름을 잡으며 사람들을 따라 무작정 짐을 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를 것 같다. 완전히 휩쓸리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이 기괴한 춤판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쪽, 아마도 닥터나 후터키에 가까운 자리에서 펜을 들지 않았을까 싶다. 에슈티케처럼 삶을 포기하는 선택이 비록 누군가에겐 구원으로 읽힐지라도, 나는 그 자리에 남아서라도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2026.3.31.

책장을 덮고도 한참 동안, 그리고 독서모임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은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마치 신발 밑창에 들러붙은 진짜 진흙이 걸음마다 끈적하게 무게를 더하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눅눅하고 먹먹한 기분에 짓눌려 있었다. 명확한 언어로 다 설명할 순 없지만 몸 구석구석에 소설 속 그 비릿하고 축축한 습기가 서늘하게 배어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삶의 정직한 정체 상태를 작가는 너무나 적나라하고도 지독하게 드러내 보였다. 이 씁쓸한 기록은 쉽게 휘발되지 않고 내 안에 묻은 깊은 진흙 자국처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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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문장사이 독서모임 책으로 읽음.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