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다녔던 회사의 기억
최근에 반삭해서 머리가 아주 짧다. 심한 지성두피기도 하지만 가고 싶었던 스타트업 면접을 망친 여파로 어차피 사회생활 못할 것 같으니 머리 모양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저질렀는데 뜻밖에 면접 제의가 또 왔다. 심지어 합격해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반삭한 여파로 회사에서는 가발을 쓰고 다닌다. 면접 볼 때도 가발을 썼다. 솔직하게 머리 모양을 드러낼까도 생각해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위험 부담이 지나치게 크다고 판단했다.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다른 생각에 치여 가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어제부터 가발 때문에 마음 속에 갈등이 생겼다 갈등하기 시작했다. 가발이 불편해서 일하는 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내 머리로 여기저기 다녀본 결과 내 원래 머리모양은 한국 사회에서 용인될 만한 머리모양이 아니다. 특히 여자한테는 더 그렇다. 남자였으면 이 문제로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가발을 쓰면 머리가 조인다.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통제하려고 머리에 씌웠다는 금색 머리띠를 스스로 쓰고 회사에 가는 기분이다. 가발을 쓰고 회사에 다닌다는 건 사회에서 자리잡기 위해 내 가치관을 거스르고 패싱 여성의 모습을 갖추라는 요구를 수행한다는 의미다. 어젯밤부터 퇴근한 다음 매일매일 이런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숨기는 게 있으면 일하는 능력이 떨어져보인다. 일하고 어깨너머로 배우는 데는 에너지가 많이 드는데 드러나면 위험할 것들을 숨기는 데 에너지가 줄줄 새기 때문이다. 이것까지 감수하고 싶지 않은데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도 않는다. 차별 때문에 내 몸이 거부하는 방식으로 타협해야 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힌다. 그 사실을 못 견뎌서 차별을 합리화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