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스톡 -- 밴프 -- 캘거리
여행 둘째 날.
오늘은 밴프에 있는 곤돌라를 타러 가기로 했다. 도시 간 이동시간이 오래 걸려 하루에 한 가지씩만 스케줄을 짰는데 오늘은 캘거리 숙소까지 가는 길 중간에 곤돌라를 한번 타는 것으로 했다. 레벨스톡에서 밴프 설퍼산 곤돌라까지 3시간 30분을 내리 가야 한다. 밴프 근처에 레이크루이스라는 아주 유명한 호수가 있는데 아이들은 호수구경보다는 곤돌라 타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나도 10년 전 레이크루이스의 아름다움에 반했었지만 그냥 집 근처에서도 많이 보는 호수라 그런지 두 번은 안 가도 될 것 같았다. 곤돌라는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과 결제를 해두었다. 산정상까지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는 곤돌라의 탑승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반드시 그 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탑승가능하다고 하여 약간의 부담을 덜었다. 어젯밤 자기 전에 이동시간을 생각해 기상시간을 정해놨고 아침에 잘 일어나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창밖으로 보이는 화창한 날씨와 아름다운 경치에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열심히 밴프를 향해 가는 와중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신랑이 비씨주와 알버타주 간에 1시간의 시차가 있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레벨스톡은 비씨주이고, 밴프는 알버타주. 나는 생각도 못했던 것인데 아주 큰일이 나버렸다. 비씨주보다 알버타주가 1시간 빠르다. 레벨스톡에서 곤돌라까지 3시간 반쯤 걸릴 것으로 예상했고 1시 50분 곤돌라를 탑승하기 위해 오전 10시쯤 출발했었다. 그런데 시차가 있으니 10시에 출발하면 2시 50분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었다. 곤돌라예약할 때도 그런 안내는 전혀 없었고, 1시간 차이가 나는 줄도 몰랐던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도 탑승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멘붕까지는 피했지만 서둘러야 했다. '골든'이라는 도시에서 주유하고 신랑 마실 커피를 샀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신랑이 주유할 동안 내가 커피를 사 왔다. 그 사이 아이들 먹을 아이스크림까지 구입해서 서둘러 차에 탔다. 역시 아이들은 뭘 먹을 때가 제일 평화롭구나. 골든이라는 도시는 산양이 자주 보이는 것으로 유명해 내심 기대했지만 볼 수 없었다. 아쉽지만 산양대신 골든에 왔으니 KPOP 데몬 헌터스의 "골든"이라도 들으라고 노래를 틀어주었다. 이제 앞으로 그 노래를 들으면 이번 여행이 기억나겠지.
밴프에 가까워질수록 비가 많이 내렸다. 비가 많이 내려서 GPS가 안 잡힌 건지 구글지도도 검색이 안되고 신랑과 나의 의사소통 오류로 인해 밴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출구를 지나쳐버렸다. 다행히 얼마 안 가서 구글지도가 다시 검색되었고, 밴프를 지나쳤다는 걸 알게 되어 다시 차를 돌렸다. 나는 신랑에게 밴프시내를 지나서 곤돌라가 있다고 얘기했는데 신랑은 곤돌라가 밴프를 지나서 다른 곳에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차를 돌려 다시 밴프시내로 들어오느라 20분 정도가 더 허비되었다. 그래도 거의 다 도착했으니 금방 갈 수 있을 것이다. 차로 꽉 막힌 밴프시내를 지나 산 쪽으로 올라오니 넓은 주차장에 곤돌라 탑승장이 있었다. 다들 화장실이 급해 화장실 먼저 갔다가 티켓을 받으러 갔는데 그 시간이 3시 5분이었다. 시간약속 지키는 것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이지만 오늘은 너무나 늦어버렸다. 직원에게 예약번호 보여주며 시차를 생각 못해서 늦게 오게 됐다는 것을 얘기하니 종종 그런 일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곧 3시 10분 곤돌라 탑승을 마지막으로 탑승이 끝난다고 했다. 3시 10분 이후에는 단체 탑승객들이 있어 더 이상 개별 탑승은 불가하다고 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곤돌라도 못 타고, 돈도 잃게 되는 것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음에는 더욱 넉넉히 시간을 잡고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티켓을 인원수대로 발급받았고, 탑승시간이 적힌 티켓도 함께 받았다.
티켓에 있는 바코드를 찍고 줄을 서서 곤돌라를 타게 된다. 직원이 곤돌라를 손으로 직접 잡아 멈춰주고 모두가 안전하게 탑승한 후 문을 닫아준다. 곤돌라 한대당 4명이 탈 수 있는데 막내가 5살로 아직 어려서 우리 식구 다 같이 한 곤돌라에 탈 수 있었다.
곤돌라는 탑승하자마자 꽤나 빠른 속도로 산 정상을 향해 간다.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짜릿하고 신기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이쪽저쪽 모두 살펴보며 재미나게 올라갔지만 높은 곳이 무서운 나는 큰아이의 손을 꼭 잡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산 아래쪽을 보면 작은 오솔길이 나있는데 곤돌라를 타지 않고도 걸어서 산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길이다. 평소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데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이 몇 명 없었다. 7분 정도 걸려 곤돌라는 산정상에 도착한다. 몇 시간째 내리고 있는 비는 하루 종일 올 모양이다. 맑은 날 탁 트인 하늘과 밴프시내, 멀리 로키산맥까지 다 보는 것도 좋았겠지만 촉촉하게 비가 내리고 구름이 흩어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는 오늘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설퍼산 정상에는 뷰포인트와 식당, 기프트샵, 전시관, 시청각실, 화장실 등 여러 편의시설들이 잘 갖춰져 있는 큰 건물이 있다. 우리는 곤돌라에서 내리자마자 미리 생각해 두었던 뷔페식당에 가보았다. 점심을 그곳에서 먹으려고 참고 왔는데 클로즈 팻말을 내걸고 단체손님맞이 준비가 한창이었다. 선착순으로 이용가능한 식당이라 예약이 불가능했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맞은편에 있는 레스토랑은 아예 영업을 안 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밴프시내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비도 오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추웠지만 건물 꼭대기 야외 테라스에 나가서 한 바퀴 돌아보고 왔다. 아이들에게 로키산맥과 밴프시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대신 헬기와 드론으로 멋지게 촬영된 밴프와 로키산맥의 풍경을 시청각실에서 상영해 줘서 보고 나왔다. 시청각실 옆쪽으로는 로키산맥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는 코너가 있어서 아이들과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곤돌라를 타기 전 기프트샵을 잠깐 구경하고 하행 곤돌라시간에 맞춰 다시 바코드를 찍고 탑승했다. 곤돌라 아래로 풀을 먹고 있는 사슴도 보고 창밖으로 내리는 빗줄기도 보며 분위기가 참 좋았지만 내려가는 건 올라가는 것보다 조금 더 무서웠다. 나이 들고 겁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곤돌라에서 하차 후 우리는 차를 타고 밴프시내로 갔다. 주차자리가 있으면 아무 곳에나 차를 세우고 걸어서 시내도 돌아보며 식당을 찾아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주차할 곳이 없다. 길가 옆도, 별도로 있는 유료주차장에도 자리가 없다. 비가 오고 있으니 너무 먼 곳은 피하려고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보았다. 그래도 주차자리가 없다. 어딜 가나 차도 많고 사람도 많다. 아이들이 간식을 먹어서 배가 많이 고프지 않다길래 숙소가 있는 캘거리까지 쭉 가기로 했다. 밴프를 출발해 20분 정도 가면 "캔모어"라는 도시가 있다. 밴프의 숙소가격이 워낙 비싸 캔모어에 숙소를 잡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정말 호텔, 모텔등이 길 옆으로 줄지어 있었다. 작지만 동네 곳곳을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은 느낌이 들었다. 캔모어를 벗어나니 산과 강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들이 펼쳐졌다. 생전 처음 가보는 길이라 잠시라도 놓칠세라 눈 가득히 담았다. 어릴 때부터 드라이브하는 걸 좋아하는 내가 이 넓은 땅으로 이사 와서 이렇게 로드트립을 원 없이 할 줄 누가 알았을까. 계속해서 엄마를 불러대는 세 아이 덕에 여유롭게 사진 찍을 시간도 없었지만 눈 가득 담았으니 만족한다. 캘거리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점점 낮아지고 평지가 쭉 이어진다. 우리 동네에서는 산에 설치하는 통신안테나도 이곳은 산이 없으니 아주 높이 철탑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비씨주는 어느 곳을 가도 높은 산이 첩첩이 있어 둥지에 쌓인 듯 포근한 느낌이 있는데 이렇게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지대를 보니 뭔가 헐벗은 와중에 숨을 곳이 없는 느낌이랄까. 살던 곳과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아이들이 지쳐갈 때쯤 캘거리에 진입했다. 계속 이어지는 고속도로에 구글지도를 켜놓고 숙소를 찾아가고 있는데 구글맵을 잘 못 보는 나는 또 실수를 했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말을 거는 와중에도 고속도로 출구번호를 찾아 잘 나갔는데 나가자마자 바로 갈림길이 나타난 복잡한 구조에 나는 그만 또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빙 돌아서 겨우 숙소로 갔다. 평소 방향과 길눈에 밝은 나이지만 구글지도 앞에서는 까막눈이다. 하도 고속도로에서 실수를 많이 해서 신랑도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증말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었다. 구경도 좋지만 역시 호텔에 들어올 때가 제일 좋다.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장거리 운전에 지친 신랑이 캐리어를 정리하려 하길래 침대 위로 떠밀고 쉬게 했다. 아이들은 본인들의 캐리어를 열어 각자 가져온 그림 그리기 세트와 책 등을 꺼내 놀며 휴식시간을 가졌다. 나도 캐리어에서 세면도구만 꺼내 욕실에 정리해 놓고 침대 위에 누워 쉬었다. 나도 운전자 옆 조수로써 신랑, 아이들 케어에 온 힘을 다 썼더니 에너지 방전이다.
나는 여유롭게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저녁 메뉴를 찾아봤다. 아이들이 안 먹을 것만 같은 메뉴들이 많다. 그냥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당들의 메뉴를 불러주며 먹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짜장면에 탕수육이요!!" 흔치 않은 의견통일이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참 좋아하는 아이들이지만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밴쿠버에서 먹는 게 전부라 먹을 기회가 있을 때는 항상 짜장면과 탕수육이다. 작년 한국방문 때도 얼마나 많이 짜장면에 탕수육을 배달시켜 먹었는지 모른다. 집에서는 냉동 밀키트로 먹긴 하지만 직접 식당에 가서 먹는 그 맛이 나겠는가. 캘거리는 큰 도시라 한국식 중국집이 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사실 나도 중국집 가는 걸 참 좋아해서 내심 쾌재를 불렀다. 메뉴를 정하고 바로 호텔을 나와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중국집으로 갔다.
짜장면 2+간짜장 1+짬뽕 1+탕수육 1을 시켜서 먹다가 탕수육을 하나 더 추가 주문했다.
아이들도 잘 먹지만 신랑과 나도 잘 먹어서 넉넉히 시켰다. 탕수육은 조금 남아서 포장해 왔다.
음식은 내 입맛에 살짝 짰지만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한국인 직원분이 친절하게 잘 챙겨주셔서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다. 안쪽에 계시던 한국인 사장님께도 인사를 하고 후식으로 사탕을 받아 나왔는데 막내가 울먹인다. 자기는 인사를 못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괜찮다고 했지만 뭔가 서운한가 보다. 하는 수 없이 신랑이 데리고 다시 식당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나왔다. 사장님께서는 그 마음이 예쁘다며 왕 반지 사탕을 주셨단다. 아주 싱글벙글인 막내를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해 웃음이 지어졌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신 사장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와 쉬는데 아이들은 호텔 수영장에 가고 싶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는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어서 핑계를 대고 미뤄본다. 밤이라 이미 문을 닫았으니 내일 스케줄 후에 시간이 나면 가자고 했다. 아이들은 내일 수영장 갈 생각에 설레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내일은 스케줄이 빡빡해서 못 갈 것 같아. 마지막날을 노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