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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20.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22 : 호영의 시야

  유난스러이 더운 사월이었다. 벚꽃은 벌써 다 스러져선 초록이 들기 시작하였다.

 ' 벌써 이렇게 더울 날인가.'

 좋게 말해 따끈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더운 봄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시절에 어울리지 않는 볕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예년 이맘때같았으면 아직 목깃까지 마이를 꼼꼼하게 여미고 나왔을 것을, 올해는 학교 측에서 벌써 춘추복과 하복의 혼용을 허용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하복에 가디건을 걸쳤지만 등줄기에 땀이 흥건했다. 판단착오였을까.

 ' 바람이라도 좀 불었으면 쓰겠는데 말이야. 봄이니까, 편서풍이었던가.'


 중간고사가 코앞이었다. 지망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꽤 괜찮은 내신이 필요했기 때문에 더위에도 머리는 바삐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응당 학생의 자세이기도 하기에.

 손에 든 과학 수업 필기 종잇장 너머에서 흐릿한 사람들의 윤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의 시선이 필기에 초점을 맞출 수록 내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렇게 흐려지고 흐려지다 보면 그들이 마침내 사라져선 꼭 나만이 이 길을 걸었다. 착각이라는 걸 알아도 그렇게 나에게 오롯이 몰입하는 순간이 좋았다.


 " 가시나가 남한테 영 관심이 없어. 주변 좀 잘 보고 다녀라."

 누군가 뒤에서 손바닥으로 등을 턱 치며 퉁명스레 말을 걸었다. 온정이다.

 " 거 동생한테 말 좀 곱게 써라."

 " 언니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만, 사춘기여?"

 나의 날선 대답에 온정은 내게 향해 눈을 흘겼다.

 " 언니 오늘따라 출근이 너무 늦지 않아? 왜 이제 나왔어?"

 " 초등학교는 오늘 개교기념일이거든. 언니는 휴무란다, 동생아. 그냥 아침에 눈이 일찍 떠져서 산책 나온 거지."

 " 부럽네."

 진심을 가득 담은 감탄사였다.

 " 부러우면 너도 공부 열심히 해서 임용고시 합격해서 선생님 하던지."

 온정이 제법 능청스런 표정으로 농을 쳤다. 나는 부러움에 사무쳤다.

 " 지금 당장 시험 성적도 알 수 없는데 그 정도 미래를 어찌 꿈꾸겠어."

 " 왜. 우리 호영이 공부 열심히 하잖아. 나는 니만할 적에 학원가에서 뺑뺑이 돌며 공부했어. 근데 니는 스스로 공부하기까지 하잖아? 시험 그거 뭐 망해봐야 얼마나 망한다고."

 온정은 부드럽게 어조를 전환하며 응수했다. 언니는 퍽 능글맞은 사람인 것 같다가도 이따금 이런 면모가 있었다.

 " 어쨌든 하는 데까지는 열심히 해봐야지. 망하면 안괜찮아."

 " 아이고 고생하는구만."

 " 내가 작년에 가르친 애들이 이 중학교 많이 들어갔던데, 딱 니 만큼만 했으면 좋겠다."

 " 적어도 언니보다는 잘 할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

 " 거 참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은데."

 " 그래서, 미워?"

 " 그럴 리가. 얼른 가, 늦겠다."

 " 안 그래도 갈거야."

 " 호영아."

 " 가라면서 왜 자꾸 불러 싸."

 " 아니 진짜 무슨 여자애 말투가... 아냐, 그냥 내 제자들 보면 잘 챙겨달라고."

 " 그래."


 나는 대충 대답하곤 발길을 돌렸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벌써 일곱시 오십칠분이었다. 여덟시 십분에는 학교 교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지면을 탕탕 박차며 속도를 냈다. 더운 날씨 탓인지 역시 몸이 좀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야 하는데. 이게 다 온정의 탓이 아닐 수가 없다.

 ' 출결 점수가 깎인다면, 그 때는 정말로 온정에게 따져야지...'

 나는 속으로 온 힘을 다해 온정을 욕하며 교문을 향해 뛰었다. 지각은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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