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균형을 찾는 일

by 책사랑꾼 책밥

일을 안 한 지 12년 정도 되었다. 아니 몇 년도에 퇴사했는지 정확한 기억도 없다. 퇴사하고 길게 몇 년은 다시 나를 불러주지 않을까 기다렸다. 미련한 착각이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다. 서른 중반을 넘기고 마지막으로 구직활동을 했을 때 이미 난 글렀다. 아이가 둘이고 둘째가 세 살인 30대 중반의 경력단절 여성은, 사회는 나 같은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

늦게 대학을 들어가 교수님 추천으로 다니게 된 곳이 마지막 직장이 된 셈인데 당시 부서의 리더는 여자였고 딸 하나를 키우면서도 일에 있어서 커리어가 돋보여 직장 생활 첫 롤모델이었다. 서른 즈음이면 대리급 정도 될 것이고 그럼 월급도 만족할 만큼 받을 수 있겠지? 대리로 한 4,5년 열심히 일하면 마흔 전에 커리어 있는 과장이 되어 있을 나를 상상했다.

육아휴직이 퇴사로 이어지고 전업주부로 살다가 마흔이 되니 내가 이룬 건 뭔지, 나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옳은 건지, 남편한테 계속 의지하고 아이들 뒤만 바라보는 힘없는 엄마의 인생이 되는 건 아닌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가족의 도움 없이 육아와 살림이 전부 내 차지여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꽉 차 올라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게 되자 남편과 싸움도 잦아졌다. 어리광 한번 안 부리고 커온 내가 친정엄마한테 하소연이라도 한번 할라치면 다독임보다 쓴소리가 들어오니까 짜증이 더해진다. 참 미련하리만큼 참는 게 익숙해진 나라서 마음에 담아둔 진실이 밖으로 나오면 내 가족들인데 나를 이해하고 안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놈에 성격 좀 고치라고만 한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열등감 가지고 살면 되겠냐고 심하게 채찍을 가하는 엄마를 대면했던 날 생각했다. 무슨 엄마가 그래? 난 내 새끼들한테 완벽한 사랑을 주고 싶다고.

내가 정한 완벽한 사랑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의 떼 부림이 시작되면 다정한 엄마 모드가 아니라 넌 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내가 받은 채찍처럼 아이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점점 외로워지는 나를 발견한 뒤 알게 되었다. 주변 엄마들과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었다가도 내 생각이 모두 옳은데 동의해주지 않으면 어린애처럼 섭섭한 마음을 담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나는 점점 혼자가 되었다.

더 이상 내가 만든 세상에서만 살기에 지쳤을 때쯤 아주 큰 용기를 내어 책모임을 시작했다. 한 권 두권 읽다 보니 내 경험적 이야기들이 책에 녹아 있는 걸 보고 희망이 보였다. 내 생각 구조를 바꿀 수 있을 희망, 관계의 변화가 생길 것 같은 희망, 당장 수입이 생기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가정과 나 사이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 희망.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현재 이 순간 ‘옳은’것에만 집중하면 우리는 더 행복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활력과 자신감을 얻어 그른 것도 처리할 수 있다.”-스펜서 존슨 「선물」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의미 없는 응원의 말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란 사람을 책에서, 같은 공감을 이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합하다 보니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무지하고 어설픈 어른으로 자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신이 건강해지니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엄마한테도 화나는 횟수가 조금씩 줄었다. 예전보다 침착하게 말하게 되었고 베베 꼬아 듣는 것도 줄었다.

삶의 균형을 찾는 일이라는 것은 일을 하며 얻는 기쁨과 생활의 안정이라고만 생각했다. 사는 일 앞에 삶의 균형은 돈의 균형이기도 하다. 돈이 나를 기쁘게 하고 생활을 안정시켜주는 역할이 되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아이로 인해 퇴사한 직장은 내 결정인데 아이 때문에 그랬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아닌척했지만 마음 안에서는 아이를 원망하며 내 인생은 끝났다는 불행한 생각이 꽤 오래갔다. 떨쳐버리기까지 완벽함을 가지려 했던 빗나간 사랑을 되돌리는 중이다. 육아정보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내 상황과 비슷했던 일을 보며 아이들은 기억 못 하는 일임에도 종종 사과한다. 사실 엄마도 저런 적이 있는데 그때 미안했다고. 잘 기억 안 나지만 사과는 받아주겠다는 아이들의 말에 용서받고 이렇게 나와 가족들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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