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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일놈의 사랑

할머니의 외사랑에 관하여

by 책사랑꾼 책밥

작년 연말에 남편이 준 지역화폐상품권으로 대보름 맞이 나물을 사러 시장에 갈 참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밖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딸이 전화받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친정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혹시 안 좋은 일인가 싶어 상기된 목소리로 얼른 전화를 건네받았다. 지금 시간 있냐는 엄마의 물음은 곧바로 와줄 수 있냐는 의미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사 남매 중 친정 부모님과 가장 오래 살았고 지금도 역시나 십분 거리에 살고 있어서 궂은일은 거의 내 차지나 마찬가지다. 좋은 때보다 부담일 때가 더 많아서 솔직히 오늘처럼 안 좋은 예감이 드는 전화는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거늘, 즐기는 단계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나 아니면 누가 가랴 싶어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친할머니는 올해 103세다. 작년에 넘어져 고관절 수술 후 회복도 했고 폐렴으로 고생하느라 이제 가시겠구나 싶었는데 건강히 살아나셨다. 노인주간보호센터에도 다니고 노인정 최고 어르신으로 활약했는데 고관절 수술 후 재활 기간 동안 집에만 있던 게 답답했는지 지난주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노인정 나들이를 감행했다고 들었다. 결국 감기로 앓아눕더니 섬망이 세게 와서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으며 초점 없는 눈으로 횡설수설하는 걸 보고 119를 불러 응급실행을 했다는 엄마의 연락이었다. 구급대원들이 왔을 땐 다행히 정상으로 돌아와 혈압도 괜찮았는데 워낙 고령이라 안심이 안 됐는지 아빠는 할머니를 구급차에 태워 응급실을 간 거였다.

뒤쫓아 버스를 타고 가려니 마음이 급했던 엄마는 나에게 같이 가달라고 다급히 전화를 했다.


시장 가는 일을 포기하고 엄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 밀어닥치는 파도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내일모레 팔십 돼 가는 아들을 아직도 여전히 사랑하고 챙겨준다. 아들이 밥을 적게 먹으면 어디가 아파서 그런 걸까 걱정하고 늦게 들어오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아빠도 나이가 들어가는 자연스러운 현상과 건강 관리상 살을 찌우지 않는데도 살이 자꾸 빠지는 걸 염려스러워해 식사 때마다 항상 아빠 밥그릇에 당신 밤에서 한 숟갈 덜어 얹어 준다. 한사코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말해도 할머니는 평생을 그러질 못한다. 숨 막히는 아들 사랑이 어쩐지 나는 부럽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부모에게서 받아 보지 못한 애틋함이라서다. 아침밥을 안 먹고 학교 가는 날에는 도시락도 싸주지 말라고 호통 쳐서 빈손으로 학교 간 날도 있었다. 종일 굶고 들어왔을 때 '많이 배고팠지'라고 할 줄 알았던 아빠는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밥상을 차리면 물에 밥을 말아먹어도 왜 그렇게 먹는지 묻지도 않고 오직 본인 식사에만 집중했던 아빠다. 그런 아빠인데 이상하게 할머니한테 아직도 돌봄을 당하고 있는 게 질투가 난다.


나는 우리 딸들한테 어떤 엄마인가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아빠는 나를 사랑했을 거다. 문제는 나한테 그 기억이 없다는 것.

기억이 없다고 이제 와서 원망할 수 없으니 방법은 아빠를 이해해 보는 거였다. 여전히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그러나 그 사랑을 자꾸만 튕겨내고 골치 아파하는 아빠를 이해하는 일이 내 질투를 끊어낼 방법인 것 같다.

할머니는 얼마나 더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을지 시간을 셈할 수 없다. 어쩌면 죽음이 눈앞에까지 온걸 혼자 감당하느라 더는 시간이 없어서 정신이 맑을 때 아들을 한 번이라도 더 챙기고 싶은 엄마의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내 일정과 상관없이 갑자기 엄마 전화 한 통에 불려 나가 마음이 복잡해지는 오늘 같은 날엔 소란을 잠재울만한 무기가 필요하다. 엄마는 신세를 탓하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냐고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간다고 한다. 엄마의 타 들어가는 속까지 돌봐야 하는 내 신세는 또 어쩌나. 밀려드는 파도에 바짓가랑이가 젖었다고 누구한테 책임지라고 울 수 있을까. 작은 힘이나마 도움이 되는 자식이 나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 엄마도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가 아니라 쌍방의 모자간 사랑이 아닌 할머니의 외사랑으로 끝나버릴 것 같은 이 사랑놀음을 유지할 수 있던 건 엄마 덕분이었노라 여기자고 했다.


소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시장에 가는 대신 계획에 없던 부엌 정리에 나섰다. 아일랜드 식탁과 찬장에 질서 없이 쌓아둔 물건들을 꺼내 반은 버리고 항균티슈로 묵은 때를 닦았다. 그러다 보면 얄궂게 나를 괴롭히던 질투심도 지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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