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맹장인 거 같아
휴대폰 액정에 둘째 아이 담임 선생님 이름이 떴다. 아직 오전 11시인데 무슨 일일까.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OO어머님. OO담임입니다. OO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맹장인 것 같다고 해요. 조퇴 원해서 일단 보건실에서 약을 먹였고요 보건 선생님이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갑자기 맹장이래요? 피식 웃음이 났고 아이를 바꿔달라고 해서 통화를 이어갔다. 장염이거나 소화불량이겠거니 싶어서 보건실에 조금 더 누워있다가 결정하자고 했는데 냅다 당장 와달라고 한다. 진짜 아프긴 한가 보네.
집 앞 소아과에 갔더니 문 열고 들어오는 폼을 보고 간이침대에 눕혀 배에 손 한번 쓱 대보고 애가 누르지도 못하게 하니까 바로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한다. 거의 맹장일 확률이 높고 아니라면 아주 심한 장염일 거라고. 후자에 기대를 걸고 종합병원에 도착했다. 피검사, CT를 찍더니 맹장이랜다. 바로 입원하고 수술해야 한다. 맹장은 늦추면 늦출수록 안 좋고 대장 끝에 충수란 곳에 생긴 염증인데 제거 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조직검사까지 나간다는 의사의 말에 그제야 아찔하다.
가을날 거리를 물들인 노란 은행나무처럼 변해버린 낯빛의 아이는 열이 오르고 있어서 거의 초주검이다. 38도가 넘어가서 입원 수속 후 병실에 올라와 해열제부터 투약했다. 간호사들이 계속 다녀가며 서류를 내밀며 사인을 요구하는 설명이 이어졌다. 항생제와 수술 후 무통주사 여부(가격이 십만 원에서 십삼만 원 사이), 내 아이의 목숨값에 들어가는 갖가지 주사와 부작용에 대한 설명들.
중증외상센터나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빠져 있어서 그런가 최대한 환자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태도가 보기 좋았다. 오히려 담당 의사 선생님은 수술 방식을 설명 중에 내가 질문을 좀 하려고 했더니 자기 얘기 다 끝난 다음에 한 번에 질문하라고 내 말을 잘랐고 끝내 질문은 받지 않았다.
질문 시간을 아껴인지 딸은 '당일 진료, 당일 입원, 당일 수술'의 은혜를 입었다. 입원한 지 한 시간 반 만에 수술실로 들어갔고 30분 만에 수술은 끝이 났다. 회복실에 옮겨져 나오기까지 총 한 시간 십분 걸렸으니 초스피드다.
인생은 타이밍이랬다. 딸의 예리한 촉은 보통의 배탈이 아닌 '맹장'이라고 단정 짓게 만든 덕분에 질문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응급으로 수술했으니 딸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