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쯤이었나 여덟이었나.
직장 생활만 이어가던 지루한 이십 대 청춘을 그냥 보내기 싫어서 뜬금없는 인라인 동호회를 찾아 가입했었다.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하던 내가 인라인 스케이트에 도전했다는 것은 이후의 삶을 당차고 즐겁게 살아보고 싶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두 살 아래 동생은 나와는 정반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낯가림이 있고, 새침해 보이는 나한테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다가와주니 받아주었다. 우린 빠르게 베프가 될 수 있었다. 인라인도 같이 탔지만 무엇보다 '술'이었다.
동생의 연애사, 나의 연애사를 같이 공유하며 회사에서 더럽고 치사한 일이 생긴 날이면 한잔 했고, 서로 약속이 펑크 났거나 남자 친구랑 싸웠거나 헤어졌거나 하면 위로 차원에서 한 잔씩 마시며 우리의 우정을 쌓아갔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까지 15,6년의 세월을 함께 맞았다. 둘 다 아이 둘, 셋을 키우는 엄마고 전업주부다. 동생은 가끔 일도 하는데 최근 남편이 중국으로 4개월 동안 파견 근무를 나가 있어서 요즘 많이 힘들어한다.
운동을 즐기고 여전히 술도 즐기는 동생의 SNS에 심상찮은 글이 올라왔다.
평소에 아무리 친하다고 내세웠던 사람이어도 정말 필요로 하고 힘들 때 나서서 자기를 챙겨주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힘들다고 말하면 나도 힘들다고 더 크게 외치는 사람뿐이란다. 내가 힘들다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이야기했을 때 귀담아 들었다가 살펴봐주는 친구가 평생 함께 할 친구인 것 같다고.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다 살피며 내 정성의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겠다고 쓴 거다.
혹시나 나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속으로 뜨끔했다. 가깝게 살면서도 자주 만나지도 않고 SNS에 올리는 사진, 댓글로 소통하는 게 더 늘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그 피드를 보고는 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뜨끔한 것도 있고.
운동 좋아하는 애가 밖에도 못 나가고 남편도 없고 많이 힘든가 보다 하고 카톡을 보냈다. 마음이 요즘 허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책 좀 추천해보랜다.
웬만해선 책 추천은 하지 않는데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뜨겁게 나를 응원한다>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4권을 추천했다. 책을 펼치면 글자가 돌아다녀 보여서 읽는 게 어렵다고 했었는데 읽을지 말지는 동생의 선택이니 추천만 했다. 그리고 내일 동생을 만나기로 했다. 거리두기 4단 계고 뭐고 사람 없는 시간에 잠깐 만나 커피 한잔으로 숨 좀 트고 살아야겠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힘들고, 지치고, 위로받고 싶고, 결국은 자기 마음을 건강하게 채우고 싶다는 건데 그럴 때 책을 찾게 된다.
독서가이든 아니든, 다 읽든 아니든 책부터 떠올리는 마음. 내 마음을 돌보려던 시작도 책이었다. 뭐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내 쉴 곳을 찾으려는 스스로의 노력. 이 시작이 책이 된 것이 나는 뿌듯하다.
<말하기를 말하다> 김하나 작가는 '하면 된다'보다 '하면 는다'는 말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기꺼이 열심히 하는데 한 만큼 되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하다 보면 어렵고 서툴었던 일이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늘어가는 건 눈에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도 '하면 는다'는 말에 동감한다.
동생과 나의 우정이 15,6년이나 쌓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