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슈왑은 어느 날 정오 그가 경영하는 제철공장을 돌아보고 있던 중 종업원 몇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복 되었다.
그들의 머리 바로 위에 '금연'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슈왑이 팻말을 손으로 가리키며 "당신들은 글씨도 못 읽나?"하고 말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 담배를 한 개피씩 나누어 주고 "밖에 나가 피워주면 참 고맙겠네, 여보게들" 하고 말했다.
그들이 규칙을 어긴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오히려 조그만 선물까지 해서 그들 자신의 중요감을 깨닫게 해준 슈왑을 종업원들은 존경하게 되었다. 이런 인물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 데일 카네기 <카네기 인간관계론> 중에서
누군가에게 지적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지적을 받으면 누구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저역시도 제가 잘못한 부분을 알고 있음에도 그 부분에 대해서 너무나도 정확히 지적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적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르치다 보면 훈계를 해야할 경우가 다반사 입니다. 하지 않았으면 하는 행동이나 말을 할 경우 바로 교육이 들어갑니다. 학급긍정 훈육법에는 "감정에는 친절하되 행동에는 단호함을 유지하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글처럼 잘 되지 않는 것이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위와 같은 찰스 슈왑의 상황이었다면 저는 "위에 무엇이 적혀있지? 금연이라고 적혀있지 않은가? 규칙을 반드시 지키기 바라네"라며 이야기를 했을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수치감을 느낄 수도 있는 어투입니다.
어른이라면 "에잇 운도 지지리 없네"라며 부정적 에너지를 쏟고 갈 수도 있겠지만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아닌 다른 경우를 경험한) 아이라면 수치감이 자신을 감싸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버츄프로젝트 수업을 하고 계시는 권영애 선생님은 어떠할지 생각해봅니다.
아이들은 언제 변할까? 잘못했을 때 야단을 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은 아이들에게 수치심을 불러온다. 수치심은 가장 낮은 에너지로 아이들의 의욕과 자율성을 무너뜨린다. 잘못했을 때 반대로, "네 미덕이 자고 있어서 그래." "네 미덕을 깨워서 다시 도전해 봐. 넌 할 수 있어."하고 말한다면 어떨까?
야단을 맞아야 할 때 반대로 격려와 도전을 받은 아이는 양심이 일어난다. 양심을 일깨우는 것이 미덕의 힘을 알려 주는 것이다.
양심은 자발성, 자율성을 불러온다. 그래서 아이 행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미덕의 힘은 내적동기를 일으켜 세운다.
내면의 힘! 내적동기! 잠자고 있던 그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는 순간 언제나 내 가슴이 떨린다.
- 권영애 <그 아이만의 단 한사람> 중에서
권영애 선생님께서는 아마 똑같은 상황에서 잠자고 있는 미덕을 발견토록 했을 것 같습니다. 수치심이 아닌 스스로 내적 에너지를 깨닫게 하는 경우입니다.
학급안에서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경우를 생각해봅니다.
- 수업에 집중하지 않을 때
- 싸웠을 때
- 욕을 할 때
- 다른 친구 괴롭힐 때
- 수업 늦게 들어 올 때
- 소리지를 때
- 과제물을 하지 않을 때
- 준비물을 못챙겨 왔을 때
등 다양한 경우 바로 지적을 하는 것이 아닌 아이들에게 수치감 대신 자존감을 세워주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미덕의 언어를 자주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너의 잠자고 있는 미덕을 깨워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