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한 가지 도구를 통해 이어내려져오는 지식, 지혜들을 습득하고 성장하게 도와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어렴풋이 짐작하겠지만 작가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 마음 등을 글 속에 녹인다. 그 기간이 짧고 길고 상관 없이 책이라는 도구로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 속에 녹아서 살아 숨쉬는 역할을 한다. 나는 그것이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내 마음의 집을 차곡 차곡 쌓아 올리는 과정이라고 본다.
작가는 독자들과 글로서 소통을 한다. 독자가 글을 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집을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집을 지을 때를 떠올려보자. 먼저 집을 지을 터를 정한다. 그 다음에 기초 공사를 실시한다. 기초 공사시에 터를 파고 콘크리트를 넣고, 철근을 심는 등을 하며 그 위에 골조 및 합판 공사를 하게 되면 집이 완성 된다. 집을 짓는 과정을 생각하면 대략적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작가가 독자의 집을 지어 주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책을 쓰고자 하는 작가의 커다란 동기가 터를 잡는 것이요. 책의 전체 맥과 같은 주제를 잡는 것이 터를 파는 것이요. 주제를 잘 다듬도록 제목을 선정하는 것이 그 위에 콘크리트를 넣는 것이요. 책의 뼈대와 같은 목차를 구성하는 것이 그 위에 철근을 심는 것이다. 초고, 퇴고와 같이 살을 붙이고 가다듬는 작업을 하는 것이 골조 및 합판 공사하는 작업과도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책이라는 형태로 하나의 집이 완성된다. 책을 만들어 나갈 때 작가 뿐만 아니라 향후 책을 읽게 되는 독자들까지도 자신이 책을 지을 때 처럼 내면의 집을 차곡 차곡 지어주게 된다.
집을 지을 때 터를 잘못 선정하면 모든 것이 잘못된다는 말이 있으며, 터를 잘못파게 되면 집모양이 이상해지며 철근을 잘못 배설하고 심으면 집이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무너지게 된다. 즉, 부실공사가 된다. 내면의 집을 짓는 과정인 책쓰기는 이 모든 흐름이 하나의 흐름으로 가지 않는다면 언젠간 드러나게 된다. 초고를 쓸 때, 퇴고를 할 때 본인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독자들이 책을 읽을 때 확실하게 느낀다.
책을 쓴다는 작업 자체가 주제 선정, 제목 선정, 목차 구성, 초고, 퇴고 따로 노는 것이 아닌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듯이 써야 된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집을 지어갈지는 독자 개인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지푸라기로 된 집을 지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나무 집, 벽돌 집 등 다양하게 자기가 원하는 집을 지을 것이다. 내 책이라는 설계도로 말이다.
책이라는 설계도를 그려주고 나는 건내준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볼지는 순전히 독자의 역량에 달려있다. 나는 성을 그렸는데 벽돌집을 생각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단순히 글을 읽는다고 해서 변화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순전히 내 생각이긴 하지만 책을 지식의 개념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책을 통해 자신에게 적용하여 변화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며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작가에게 없다.
작가라는 업으로서 독자들의 내면의 집을 지어주기로 각오를 할 때 그 길은 외롭기도 하고 험난하기도 하다. 내가 걷고 있는 그과정 또한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듯 하다.
하지만, 내 글을 통해 독자들이 변화되어 자신의 삶을 착실히 살아갈 것을 알게 되면 그야말로 진정한 작가(作家)의 삶이 아닐까?
이쯤 오면 이 질문을 하고 싶을 것이다.
“작가로서 책을 내는 방법을 왜 안알려주시나요?”
역으로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어린아이가 부모가 요리하는 것을 봤다. 후에 자기가 처음부터 요리를 하겠다고 하면 대부분의 부모는 어떻게 할까? 처음부터 다듬어진 재료를 가지고 같이 요리하자고 한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는 자기가 다 만들겠다고 떼를 쓴다. 이와 같다.
시중에는 작가들이 책 쓰기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을 알려주는 책이 많다. 또한 마인드 셋에 대한 부분도 다른다. 현실적으로는 선배 작가들이 먼저 길을 걸으면서 얻게 된 마음가짐 통찰 부분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잘 되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기술적인 부분을 먼저 요하게 된다.
기술 적인 것을 먼저 요구하는 것은 요리할 때 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요리를 하라고 칼을 쥐어주는 것과도 같으며, 한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아이에게 글을 읽고 토론을 하라고 하는 것과도 같으며, 수를 알지도 못하는데 근의 공식을 통해 셈을 하라고 하는 이치라고 볼 수 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이 말을 어렴 풋이 들어봤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행하는 폭력보다 말, 글과 같이 지식, 정보, 언론 등과 같은 것들이 더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비유는 뉴스, 책 등을 접할 때 어렴풋이 느꼇으리라 생각해본다.
책 쓰는 것에 대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책을 쓰게 되면 글 속에 나를 녹여내는 것이 아닌 나를 감추는 글, 나를 없애고자 하는 글이 탄생한다. 그 결과 독자들과 책이라는 매개체로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삶을 녹아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서전보다 못한 허세 넘치는 글이 탄생하게 된다.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집을 파괴하는 사람이 있다. 그 또한 작가이다. 이게 뭔말인가 싶을거다. 과거 내가 책을 쓸 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원고 쓸 때 내 마음은 ‘내 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먹었다. 그러자 글 속에 내 자신을 녹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 나의 부족한 부분이 드러날까봐 글로서 감추기에 급급했다. 이 말이 뭔말인지 이해가 가는 사람이 있고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담백하게 나의 삶을 녹여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닌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나의 지식, 지혜, 경험 등을 글로써 뽐내고자 하는 허세 섞인 글, 꼰대와 같은 글들을 쓰고 있었다. 이러한 글은 책을 만들어가면서 작가가 자신의 글 속에 녹아들어져 있는 습, 관을 알지 못한다면 작가 본인의 그동안 지은 내면의 집을 도로 무너뜨릴 수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쓰여진 책을 독자가 보게 된다면 그들의 마음 속에 튼튼하게 지은 집 또한 부수게 된다.
작가라는 길은 거창하지 않다. 어찌보면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을 때부터 그 길을 걷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이 길이 결코 긍정적이고 좋은 길, 저 푸른 언덕 뒤에 펼쳐지는 낙원의 세계와 같은 이상향적 길을 걷는거라고 장담은 못한다.
이 길은 나와 독자가 서로 성장하며 나아갈 수 있는 상생의 길이며 때로는 외롭고 고독스러우며 책이라는 한 권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어두운 터널을 걸어야 하는 과정이다. 터널끝에 서서라도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가 책을 통해 성장 했음을 인지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