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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마루 황상하 Dec 03. 2022

우울하고 기운이 없을 때

2022. 11. 29 ~ 2022. 12. 03 작가의 기록

2022. 11. 29.


무척이나 외로운 감정이 사무칠 때가 있다.

나와 친했던 것이 더 이상 친함의 그 감정이 아닌 연결의 매개가 끊어졌을 때 외로움을 넘어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오늘 아는 사람과 연락을 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과거에 자주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던 사람과 연락을 했다. 용건이 있어서 말이다.

전화 통화 속 목소리의 감정선은 '이 사람이 왜 전화했을까?', '전화한 의도가 무엇이지?'라는 긴장이 역력하여 나긋나긋한 것이 아닌 날카로우며 경계가 잔뜩 선 목소리. 마치 길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걸 때 나에게 대하는 듯한 말투, 어조와 강세. 오늘 한파가 강렬하게 불어닥치는데 목소리에서 한기 서린 목소리.


목소리 너머로 느껴지는 감정은 '이 사람과 빨리 통화를 끊고 싶다', '1분 1초도 아깝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나에게 차갑게 굴게 되면 당황스럽다. 아니 당황감을 넘어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속담처럼 '이 사람과 같이 보내온 시간은 무엇이 되는 걸까?'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오만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외로움, 고립감, 고독, 서글픈, 우울, 허탈 등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배우게 되는 룰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기 전에는 몰랐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는 반갑게 맞이해줘서 상대방이 무안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 최소한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이야기 나눌 때 상대방이 어떻게 지냈는지, 요즘 하고 있는 것, 관심 있는 것, 날씨 등 스몰 토킹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서로에 대한 비즈니스 혹은 진중한 이야기를 하고 스몰 토킹 등 그런 대화로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먼발치에서 배워나갔다.

오늘 그 사람과 통화하면서 차가운 목소리, 빨리 끊고 싶은 태도 등 모든 것을 종합해봤을 때 이 사람은 '나와 연을 끊고 싶은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쪽으로 편향되게 생각하는 것은 맞지 않다. 그래도 비즈니스를 위해 통화하자고 연락을 줬는데 3번 정도 미뤘으면 나와의 연을 끊고자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접어들어도 될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에 나와 친했던 사람들이 변해간다. 아니 변질되어 간다.

그 사람을 대하고자 하는 감정, 태도 등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나의 선을 넘어 버릴 때가 많다. 그래도 선을 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면 예수님께서도 성령훼방죄가 아닌 이상 7번씩 70번을 용서를 하라고 하신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알고 변화하기 시작하면 용서를 할 의향이 있다. 사람의 성격은 고정적인 것이 아닌 어느 환경에 있고 그 환경을 개선하고자 혹은 벗어나고자 노력하면 변하는 것이 성격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외로운 마음이 사로잡는 밤. 나는 글을 쓴다. 세상은 변해가고 사람도 변해간다. 주변 환경에 의해 말이다. 나는 세상에 따라 변해가기도 하는데 내 마음은 그대로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그 마음이 말이다.


2022. 12. 03

수요일에 일정이 있어서 잠시 서울에 다녀왔었다. 그 뒤로 토요일인 오늘까지 축 쳐 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지하철에 사람은 많지, 거리는 길지 뭐 다양한 이유로 소진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하지 못하는 그 상황은 머리로 알지만 마음속에서 가슴 치고 메아리치며 일어서서 해내야만 하는 일들을 하고 싶다. 하지만, 기름 그릇 안에 기름이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나무가 불타고 있는 것처럼 수요일 이후 오늘까지 침대에 누워 나무늘보처럼 축 쳐져있었다.


신이 있다면 신께 기운을 달라고 빌 정도로 정말 기운이 없는 일주일이었다.

정말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신을 생각하니 예전 교회 다닐 때가 생각났다.


대한민국은 참 히얀하게 종교를 생각하면 거룩하고, 세상을 등져야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하면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불경을 읽는 다고 하면 절을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 불경 등에 관심 있어도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성경을 읽는데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을 한다. '교회 나가지 않으면 믿음이 약해진다', '신앙의 공동체는 교회 생활을 해야만 강해진다'라는 등의 말을 펼쳐놓는다.


교회를 5번 옮겨본 사람으로서 교회에서는 말씀이 안 나온다. 성경 말씀이 안 나온다. 정치 얘기, 유튜브, 책, 강연 등에서 들을 수 있는 자기 계발 이야기 등을 설교시간에 전해준다. 과연 그것이 종교일까? 아니면 강연하는 자리일까? 의문이 든다.


종교의 병폐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 나보고 "이단", "사이비"라고 지적을 한다. 의문이 든다.


성경에 보면 사랑하는 자를 근실히 징계하라고 적혀있고(잠 3:12, 잠 13:24, 계 3:19), 징계와 꾸지람을 싫어하며 감추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잠 3:11, 잠 10:18, 잠 12:1)라 하셨다.


교회를 다녀보면 목사를 신의 아들, 신의 사자처럼 생각하며 예수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섬기는 병이 있다고 보인다. 그러니 목사가 말을 해도 가만히 있고 어떤 말씀을 전하여도 베뢰아 사람처럼 말씀이 참인가 거짓인가 살펴보지도 않는다(행 17:11). 그냥 성경에 있는가 보다 생각하고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는다.


의문이 든다. 과연 이런 종교 계를 보면 하나님, 예수님께서 초림 때 노끈을 만들어서 성전 정화를 안 하실까? 롯 때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한 것처럼 노아 때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어 물로 쓸어버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러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신다. 참 사랑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라고 본다(호 6:6).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요 1:1)이라고 하셨으며 예수님의 이름 또한 말씀으로 오셨다고 한다(요일 1:1~2). 그럼 이 말씀을 정치, 자기 계발 등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성경은 성경 안에서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고 본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서 성도에게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고 성도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서 천국에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다. 목사가 한 말을 듣고 참인가 아닌가 성경을 상고해보고 목사가 전한 말씀이 성경과 다르다면 얘기를 해보고(사 1:18)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으로 가서 들어봐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의무다.


내가 왜 교회를 5곳이나 전전했을까? 성도로서 그 의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교회는 옆에 있는 불교 관련 사무실을 저주했으며, 두 번째는 말씀은 단에서 안 나오고 친목도모나 하고 있으며 세 번째는 정치 이야기, 자기 계발 이야기 등이 단에서 나온다. 네 번째, 다섯 번째도 비슷했다.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나는 매일 성경을 상고한다. 말씀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오실 때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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