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자,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은 조금 더 먼 곳까지 가 볼 생각입니다. 올해는 이상하게도 먹을거리가 부족하네요. 곧 겨울도 다가올 것 같은데 모아놓은 식량도 없고 슬슬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산속의 밤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온도가 급격히 내려갑니다. 그래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으니 큰 걱정은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넓지는 않지만, 아늑한 저만의 공간이 너무 좋습니다. 오늘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죠.
잠시 쉬다가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꽤 높은 산이라 적막감이 흐릅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혼자 지내는 이 생활이 외롭기만 합니다. 때로는 친구가 있으면 하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면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요? 혼자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해 봤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 혼자서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합니다.
혼자 이렇게 지내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이 어디론가 떠나고 난 뒤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분명 식량을 구하러 간다고 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날 이후로는 부모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밤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항상 누군가와 같이 생활하다가 혼자되면서부터 겁이 많아졌습니다. 무서운 날짐승이 공격할까 봐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겁쟁이로 숨어 지내다시피 생활하면서 신경도 예민해지고 누군가를 믿지 못하는 의심병이 많이 생겼습니다.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서 도망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생활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 밤은 달이 무척이나 밝습니다. 제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입니다. 둥근달을 보면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부모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서글픈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이제 눈에서는 눈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 동안 혼자서 슬픔에 잠겨 살았더니 눈물도 말라 버린 것 같습니다. 달나라에는 방아 찧는 토끼가 산다고 하던데 얼마나 힘들고 외로울지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오늘 밤도 깊어집니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침 햇살이 내려앉으며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이라 아직은 상당히 춥습니다. 저는 그래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털옷을 가지고 있어서 추위를 이겨낼 수는 있습니다. 그나마 감사할 일이죠. 오늘 하루도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배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이곳저곳 혹시 먹을만한 열매가 있는지 유심히 살피며 다녔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생활하면 그나마 허기진 배를 채우기는 합니다. 하지만 굶기 일쑤였습니다.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어디 가서 일을 하고는 싶었으나 저를 받아 주지는 않았습니다.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거의 힘들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산새들이 아침을 알리며 지저귑니다. 매일 아침 듣는 새소리지만 오늘은 유난히 소리가 청명하고 아름답습니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입니다.
오늘은 산 정상 쪽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는 않은 곳입니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뭔가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도 잘 모르기도 하고 길이 굉장히 험합니다. 예전 한겨울에 멋모르고 정상으로 향했다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해 추운 겨울에 얼어 죽을 뻔했던 무서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 뒤로는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곳입니다.
문단속을 잘해놓고 집을 나와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산에서 생활해서 제법 산을 잘 타는 편입니다. 예전의 그 악몽을 이겨 내야만 새로운 곳으로 가 볼 수 있습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산 정상 쪽으로 향했습니다. 흙길을 지나고 바위를 올라 넘고 때로는 나뭇가지를 건너며 열심히 올랐습니다.
얼마나 올랐을까 드디어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던 산 정상에 거의 다다른 것 같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지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았습니다. 드디어 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돌무더기가 쌓아져 있었습니다. 그 위에 올라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봤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그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습니다. 첩첩이 포개어진 산들이 늘어서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멋진 산그리메가 제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순간 감탄사가 튀어나왔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서서 그 경치를 감상했습니다. 아니 잠시 넋을 잃고 그냥 바라본 것 같습니다.
경치에 잠시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오늘도 9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 먼 곳까지 겨우 올라왔는데 여기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서글퍼졌습니다.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엄마 아빠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과 함께 슬픔이 몰려왔지만 역시나 눈물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 같아서 더 슬퍼졌습니다.
그렇게 낙담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룡 발자국 같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듣는 이상한 소리에 순간 몸이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 잠시 얼어붙었다가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돌무더기 뒤쪽으로 급하게 몸을 숨겼습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외계어 같은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발소리와 그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무 뒤에 급히 몸을 숨기고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네발 달린 괴물들이 이쪽을 향해서 오고 있었습니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네발로 성큼성큼 걸어왔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모습이 참 기괴했습니다. 네발인데 앞쪽 두발은 길쭉하니 부러질 듯 굉장히 얇았고 뒤쪽 두 발은 제법 굵고 튼튼해 보였습니다. 머리에는 널찍하고 동그랗게 보이는 이상한 피부가 자라 있었습니다. 피부 색깔도 검은색과 파란색 등이 조합된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괴물들에게 잡히는 날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거의 기절 직전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다행히 저를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서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반대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 조용하길래 조심조심 돌무더기 쪽으로 기어갔습니다. 저 괴물들을 따돌려야 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돌무더기에 올라서서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나타난 두 괴물과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순간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아 이제는 나도 끝인가 보다. 이렇게 괴물에게 잡아먹히겠구나'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그 괴물이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손에는 제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열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제게 내민 그 손이 너무 무서웠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이제는 도망갈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치 제게 먹어 보라고 권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서웠지만 그 괴물이 주는 열매를 받아 들었습니다. 제 머리보다는 조금 작은 빨갛게 잘 익은 그 열매를 그 자리에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괴물은 제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신기했던지 그냥 저를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괴물의 존재는 잊어버리고 그 열매 맛에 빠져서 아주 오랜만에 배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열매는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황홀함에 빠져서 그 괴물 앞에서 최후가 될지 모르는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