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의 이해
솔직히 말하면, 슬립노모어를 보기 전까지 나는 이 공연을 하나의 ‘색다른 연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슬립노모어는 3시간짜리 공연이고, 주중에는 저녁 7시에 시작한다는 점부터 부담이었다.
‘요즘 이런 체험형 공연 많다지만, 과연 끝까지 집중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도 있었다.
그런데 각기 다른 루트로 알게 된 두 사람이 연달아 추천했다.
우연으로 넘기기엔 확률이 낮았다.
결국 토요일 오후 2시 45분 회차로 예약했고, 이 선택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경험으로 이어졌다.
슬립노모어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이미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된 몰입형 연극의 대표작이다.
뉴욕 오리지널 공연이 장기 흥행을 이어왔고, ‘공연의 문법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관객석이 사라진 순간, 연극은 시작된다
입구에서 외투와 소지품을 맡기면 랜덤으로 카드를 한 장 받는다. 이 카드는 웰컴드링크 쿠폰이자 입장 순서를 결정하는 장치다.
사회자가 “Red 9, Black 10” 식으로 호명하면 같은 카드를 받은 사람들끼리 한 그룹이 된다.
하지만 이 ‘동행’은 엘리베이터까지다.
동행은 우연이고, 고립은 필연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순간, 직원이 무작위로 관객을 지명해 내리게 한다.
혼자 내릴 수도, 여러 명이 함께 내릴 수도 있다.
같이 온 사람과 공연 내내 동선을 함께할 수도 있고, 완전히 헤어질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 마주한 첫 살인
건물 전체는 귀신의 집처럼 어둡다.
엘리베이터 버튼은 가려져 있어 몇 층인지 알 수 없고, 음침한 음악이 계속 흐른다.
긴장하지 않으려 해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던컨 왕의 몸에 독이 퍼지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
맥베스가 베개로 눌러 질식시키는 순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된다.
그 순간 관객은 더 이상 제3자가 아니다.
왕이 숨이 끊어지기 직전 관객의 손을 붙잡는 장면에서는,
나 역시 이 살인의 공범이 된 기분이 들었다.
레이디 맥베스에게 선택된 관객은 짧은 댄스 타임을 갖는다.
감각을 과잉시키는 장면들
EDM 장면에서는 마치 약물로 인한 정신 착란을 체험하는 듯한 감각이 밀려온다.
최후의 만찬 장면은 슬로 모션처럼 연출되어, 시간의 감각이 흐트러진다.
체력의 한계에서 드러나는 몰입의 대가
6층 건물을 계단으로 오르내리고, 좁은 통로를 계속 드나들다 보니 나중에는 허리와 무릎이 후들거렸다.
자작나무 숲을 혼자 걷는 장면에서는
‘이러다 공황이 와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장면
마지막 장면에서 맥베스가 목을 매달고 조명이 완전히 꺼진다. 그런데 다시 불이 켜져도 시신은 그대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끝났는데 끝나지 않은 느낌. 이 여운이 오래 간다.
왜 이 공연은 ‘관람’이 아니라 ‘체험’인가
이 공연은 배우와 관객의 경계가 없다. 나는 구경꾼이 아니라,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증인이 된다.
맥베스를 따라다니다 보니 같은 장면을 두 번씩 본 것도 여러 개였다. 그만큼 놓친 장면도 많았다는 뜻이다.
배우들의 빠른 동선을 끝까지 따라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적당히 다른 인물을 따라갔어야 했나’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래도 두 번 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흑백 영화만 보다가 처음 컬러 영화를 봤을 때,
2D 애니메이션에서 3D로 넘어갔을 때 사람들이 느꼈던 충격이 이런 것이었을까.
슬립노모어를 보고 나니, 그동안 봐왔던 연극과 뮤지컬이 모두 평면적으로 느껴졌다.
한 번이면 충분한, 그러나 잊히지 않는 경험
이 공연이 궁금하다면, 체력과 호기심이 남아 있을 때 보길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50세가 되기 전에 한 번쯤은 꼭 경험해볼 만한 공연이다.
� 슬립노모어 정보 정리
공연명: 슬립노모어(Sleep No More)
러닝타임: 약 180분
관람 방식: 관객 이동형·몰입형 연극
관람 팁: 편한 신발 필수, 체력 안배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