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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형사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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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드림폴 Mar 06. 2021

옷도 단정하게 입었습니다

글의 내용은 피해자 보호와 사건 보안을 위해 사실을 바탕으로 각색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옷도 단정하게 입은 상태였습니다.

조사를 마친 피해자는 볼펜을 받아 들고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적었다. 조서에 자신의 손도장을 꾹꾹 찍는 피해자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피해자가 돌아간 뒤 다시 한번 찬찬히 조서를 읽어보다가 마지막 저 문장을 보고는 가슴이 턱 막혔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미안하기도 했다.

가연(여, 21세, 가명)이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마음이 들떴다. 맛난 음식에 맥주도 한잔하면서 절친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즐거웠다. 어제부터 내린 눈이 제법 쌓여서 그래도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표를 끊고 버스를 기다렸다. 추워서 터미널 안에서 큰 유리 문으로 승차장을 바라보며 버스가 들어오는지 살폈다. 그러다가 비슷한 또래의 남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는데 그 뒤부터 자꾸만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 같아 들떴던 마음은 사라지고 왠지 불쾌했다.

버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승차장에 나가 줄을 서서 버스를 타려는데 누군가 엉덩이를 살짝 움켜쥐는 것 같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까 눈이 마주쳤던 남자였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모른척했다. 그러고는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았는데 그 남자가 옆자리에 앉는다. 자리도 많은데 왜 하필 옆에 앉을까. 자리를 옮길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어느새 사람들이 꽉 찼다. 우연히 스쳤던 거였는데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생각하면서 몸을 살짝 틀어 옆자리 남자와 최대한 닿지 않으려고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자꾸 어깨를 기댔다. 버스가 차선을 바꾸거나 회전할 때면 아예 어깨를 누르듯이 몸을 더 밀착했다. 너무 무섭고 끔찍했다. 가연이는 놀라서 어쩔 줄 몰랐다. 그저 몸을 더 웅크릴 뿐이었다. 그 남자는 몇 번을 그러다가 가연이의 엉덩이를 살짝살짝 움켜잡았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까 처음에도 우연이 아니었다. 아니 도대체 왜 나한테.

가연이는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니 왜 자꾸 만지세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자 그 남자는 주변을 힐끔거리고는 오히려 화를 내며 욕을 해댔다. '아니, 뭐래 이 씨00이, 왜 지랄이야 이 미친00아.' 그러고는 마침 버스가 정류장에 서자 카드를 찍지도 않고 황급히 내렸다.

가연이는 너무 무섭고 서러웠다. 이게 말로만 듣던 성추행이구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내가 피해자인데 피해를 당하고도 욕을 먹어야 할까.

옷도 단정하게 입은 상태였습니다.

피해자는 '나는 옷도 단정하게 입었는데 왜 성폭력 피해를 당해야 하나요'라고 세상에 묻는 것 같았다. 그동안 우리의 세상이 피해자에게 '옷을 단정하게 입으면 성폭력 피해는 당하지 않아.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면 그건 네가 단정하지 못해서야'라고 가르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고 씁쓸했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많은 인식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세상은 여전히 피해자에게 성폭력 피해의 책임을 돌린다. '아니 그러게 왜 여자가 밤늦게 술을 마시고 다녀?', '그 여자 옷을 그렇게 야하게 입고 다니니까 당하지.', '먼저 꼬리친 거 아니야? 혹시 돈 뜯어내려고 하는 꽃뱀 아니야?'

세상은 여자가 옷도 단정하게 입고 조심만 하면 성폭력 피해를 당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피해자들의 서럽고 억울한 생채기에 소금을 뿌려댄다. 오히려 피해자가 부끄러운 세상이고 세상은 피해자들에게 수치를 강요한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하고 수치를 당할 자들은 가해자들인데 말이다.

옷도 단정하게 입었는데 왜 그런 피해를 당해야 했는지. 왜 피해자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아니 왜 그렇게 말해야만 했는지. 이제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답할 차례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세상의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범인을 잡아 피해자에게 답할 차례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대는 억울한 피해자일 뿐입니다. 당신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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