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말하는 기막힌 논리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우리 집 넷째. 똥강아지 4호는 잘 이른다. 그놈만 그런가 생각해 보니 1호 2호 3호는 이르는 일이 잘 없다.
"왜 막내는 잘 이를까?"
태어난 서열과 일명 꼰지르기 능력의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어허 꼰지르기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도 나오는군.
남편과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좋겠다. 분명 날카롭고 재미있는 대화가 이어지겠지. 가족들과 함께 생활 속에 궁금증을 이야기로 함께 풀어가는 과정은 충만하고 즐겁다. 가족끼리는 눈치 보며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진심을 툭 던지고 진심을 툭 받고 하다 보면 엄마인 나는 성찰 거리를 얻는다. 보너스로 며칠간 신랑과 나누어 먹으며 웃을 수 있는 대화의 조각을 얻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커가니 가족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앉는 일이 드물어진다.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가족여행을 갈 때도 '이번엔 패스'라고 말할 수 있는 독립성과 자율성이 가끔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3호도 언니 오빠의 패턴과 많이 비슷해졌다. 1, 2호가 비슷하고 3, 4호가 비슷하더니 이제는 3호가 언니 오빠 쪽으로 기울어졌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생각도 몸도 자라고 있느니 나와 신랑이 잘 늙어갈 궁리에 집중하면 된다는 마음이 자주 든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게 우리 아이들이구나 생각한다. 크게 감사한 일이다. 나와 남편이 언젠가 사라져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이라는 믿음이 있다. 평생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부모는 없지 않은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형아 누나들 사이에서 막내가 이를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큰 아이들이 막내를 바라보는 시선은 쿨함과 따뜻함이 아닌 다른 온도일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막내가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면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막내를 이래도 이쁘다 저래도 이쁘다 키우는 엄마 때문에 막둥이가 우리 집 명예에 먹칠을 한다던 큰 아이의 말이 또 생각나서 웃음이 난다. 우리 가족의 명예는 무엇이고 먹칠은 또 무엇일까? 암튼 있어 보이는 단어를 쓰고 싶어 하는 큰 아이도 참 귀여운 놈이다. 큰 형에게 명예니 먹칠이니 하는 이야기를 막둥이와 엄마가 함께 들었던 일화는 머리숱이 비교적 적은 옆반 선생님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담임 선생님께 엄마가 전화를 받았던 날이었다.
"어머님 똥강아지가 글쎄... 옆반 선생님께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하네요. 대화 좀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언제부터 대머리였어요???"
막내는 이렇게 자라고 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처음 보는 사람 무릎에도 자연스럽게 앉는 아이로, 등하굣길에 신발주머니를 돌리며 여기저기 참견할 곳을 찾는 아이로, 지나가는 쿠팡 아저씨와 경비 아저씨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너스레를 던지는 아이로 말이다.
"아저씨 오늘 날씨가 많이 춥죠?"
"응... 그러네"
"저는 학교 가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응... 그래"
어디서 저런 아이가 나왔을까? 아빠도 엄마도 못 가진 성향을 가진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도 웃음이 나는 일이다. 사랑스러운 막내가 형아 누나에게도 사랑스러운 동생일까? 그럴 리 없다. 막내가 가장 흔하게 형과 누나를 이르는 대목들은 이러하다.
"엄마 형아가 나한테 바보라고 했어요!"
"엄마 누나가 나랑 안 놀아줘요!"
"엄마가 사준 과자, 지들끼리 먹고 나는 안 줘요!"
내부 고발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다둥에 네 집에서 잔잔한 고발들은 건성건성 지나간다. 오래가지 않아 자동 소멸한다. 하지만 막둥이가 크게 울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안방으로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달려온 막내가 등장하면 아이의 얼굴을 봐주고 아이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 부모가 개입해야 하는 시간이다. 개입하게 되면 가장 먼저 막둥이의 감정을 만난다. 이성적으로 막내에게서 나오는 말을 듣고 먼저 판단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큰 아이들을 만나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면서 함께 가르마를 타면 된다.
막내는 지금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부당하다고 느낀다. 그 아이가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부당하다고 느끼는지 따뜻한 눈빛과 말투로 마중해 본다.
"지원이 뭐가 섭섭했을까?"
"아이고 우리 막둥이가 화가 났구먼. 이리 오세요!"
"아 형아랑 무슨 일이 있었구나. 막둥이가 형아 한데 많이 억울했구나" 하고 꼭 안아준다.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다. 마음을 알아주고 엄마가 안아주면 아이의 목소리도 아이 얼굴의 열도 한소끔 내려간다. 흥분해서 안방으로 달려온 막내를 그대로 큰 아이에게 데려가면 안 된다. 한소끔 흥분이 내려간 막내가 등장하면 형아나 누나 쪽으로 데리고 간다. 그때 팩트체크를 해도 늦지 않다.
다음은 막둥이가 엄마에게 이른 이야기의 맥락을 찾아본다. 맥락은 큰 아이들이 막둥이보다 훨씬 정확하게 전해줄 수 있다. 이 이야기도 들어보고 저 이야기도 들어본다. 막둥이와 큰 아이가 보고 느낀 일들을 모두 듣는다. 참 희한하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일인데 둘의 이야기는 참 다르다.
사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 속에서 대부분의 오해는 풀어진다. 판단을 하러 갔지만 엄마의 진짜 역할은 서로의 감정을 말하게 하고 들어보게 하는 일이다.
이런 과정에서 큰아이는 느낀다.
"내게는 그냥 사소한 일이었는데, 그게 저 아이에게 엄청 중요한 일이었구나. "
이런 과정에서 막둥이는 느낀다.
"형도 나에게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렇게 막둥이가 다리를 베베 꼬고, 엄마 뒤로 숨는 모습을 보면 안다. 녀석들 사이에 큰 앙금은 풀어졌구나. 그나저나 왜 막둥이는 잘 꼰지를까. 큰 아이들을 모아 물어본다.
세 아이가 이내 합창을 한다.
"그거야 울기만 해도 엄마가 그냥 막둥이 말 들어주라고 하니까"
"왜 엄마가 막둥이가 울기만 하면 막둥이 편을 들까?"
"엄마가 저 놈이 울면 귀찮아지는 게 싫으니까 그렇겠지.
엄마가 제일 기운이 없는 나이에 막둥이를 낳았으니까"
"엄마가 귀차니즘이 커져서 그렇다고?"
"그렇지 그러니까 저 놈은 원하는 게 있으면 우는 거겠지. 우는 게 먹히니까"
원인을 찾은 건가. 정리해보면 이렇다.
<막둥이가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고자질을 하는 이유>
1. 엄마가 제일 기운 없을 때 낳은 아이가 막둥이니까
2. 막둥이가 울면 엄마는 이미 피곤한데 더 귀찮아 지니까
3. 웬만하면 막둥이가 이야기하는 건 다 들어주게 되니까
그러는 사이 막둥이가 온다. PC 모니터에서 엄마가 쓰고 있는 글을 보고 여러 마디를 전한다.
"뭐야 막둥이가 왜 잘 꼰지를까? 엄마가 쓰고 있는 그거 내 이야기 아님?"
"으이~ 엄마 내 이야기 쓴다고 아빠한테 이른다"
으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