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딸은 처음이라
그새 6년이라는 시간이 빨리도 지나갔다.
초등학교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데 벌써 중학교 교복을 맞추러 다닌다니 세상의 시간을 모두 우리에게 돌린듯 하다. 이상하게도 주말부부생활을 많이 했던 우리 가족은 아이도 늦게 갖게되었다. 다른 집에서는 백발백중이라는 말이 난무할 정도였는데, 우리는 왠지 백전백패한 것 같은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나온다. 누가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주말부부를 한다고 했던가. 도대체 나는 나라를 몇번을 구한 것이며, 내가 구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지구상에 있는 어느 나라인가 말이다.주말부부를 하면서 전생에 얼마나 죄를 지어야 이런 시련을 얻는 것인지 항상 궁금해 했었다.
너무나 힘들게 살아온 주말부부로 부부는 항상 위기를 겪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렵게 가진 딸이 초등학교 입학을 한 때는, 아내가 생각지도 못한 경남 통영으로 발령이 난 바로 그 해였다. 경남 통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여행으로 갔던 통영이 생각났다. 건어물과 꿀빵가게가 넘쳐나는 통영시장의 복잡한 거리, 주차는 왜 그리 힘든지 주차를 하고 한참을 걸어와야 꿀빵가게가 보였다. 이순신장군이 수군통제영을 지내셔서 통영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어딜가나 통영은 어촌이었고, 그렇게까지 살기 편한 곳은 아니었다. 그런 통영으로 발령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집은 어떻게 할까, 나는 통근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떨어질 아내와 딸의 걱정보다 내 걱정이 더 앞섰던 이기적인 남편이었다. 이런 못된 남편을 용서하라기보다 당장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내와 같은 학교에 입학하게 된 딸과 그런 딸과 둘만 통영생활을 해야 하는 아내에게 내가 해줄말이라고는 없었다. 매주 가족을 만나러 금요일저녁마다 달려가던가, 통영이 지겨울 때가 되었을 때는 항상 다시 창원으로 오기도 했다.
처음 살아본 통영의 모습은 한국의 나폴리 비스므리한 느낌 그대로였다. 이미 우리는 한국의 나폴리라는 통영의 모습에 세뇌되어 나폴리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도 그냥 나폴리에 사는 것이 되었다. 나폴리피자나 먹어봤지 나폴리를 가봤어야 한국의 나폴리인지 아닌지 판단을 할텐데 우리에겐 그런 경험치가 부족했던 거다. 신선하지 않은 해산물로 끓은 짬뽕을 먹는가하면, 해안가 근처의 술집에서는 늦게까지 술취한 취객들이 돌아다니는 나폴리의 모습에 금방 질려버렸다.
나름 편리하다는 통영 중에서도 신도시가 있는 곳이었지만, 역시나 이순신장군의 외로움을 공감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통영에서의 초등학교 1학년 생활을 무사히 아니 다행히 마치고, 다시 창원으로 복귀한 아내와 딸은 창원의 생활에 너무나 만족해하며 5년을 쏜살같이 달려왔다. 너무나 귀엽던 딸의 모습은 점점 어른스러워지고 있다. 그렇게 귀여워하던 딸을, 이제는 아내가 호되게 야단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적잖이 낯설다. 1학년을 같이 다닌 모녀가 6학년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사실 그렇다면 누구보다 가까웠을 껀데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생기나 보다 했다. 같은 학교에 엄마가 선생님으로 있다는 것만으로도 딸에게는 참으로 마음 든든한 지원군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 딸 아이가 이제는 중학생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의 귀여운 모습보다 이제는 정말 어른이 되어간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쓸쓸해진다. 그렇게 갖고 싶던 딸, 그렇게난 늦게 갖게된 딸, 그리고 너무나 귀엽고 똘똘한 모습에 시간가는줄 모르고 지켜보던 우리 부부. 이제는 십수년이 지나다보니 조금씩은 무뎌지는가 싶다. 중학생이 된다는 그 기분을 난 이제 기억하기 힘들지만, 교복을 맞추고 운동복을 새로 사고, 책들을 큰 가방에 우겨넣는 일상을 보게 되니, 이건 정말 이제 현실이구나라고 느껴진다.
집에서 멀지 않은 여자 중학교에 배정된 딸은, 매일 아침 부족한 잠을 이겨내고 일어나 아침도 대충 먹는 듯하며 아빠 차에 실려 학교로 간다.
중학생이 되고 난 후부터 부쩍이나 외모에 신경을 쓴다. 워낙 털털하게 다니던 아이인데 앞머리부터 치마길이, 패딩색깔부터 길이까지 뭐하나 신경을 안쓰는게 없어졌다.
아빠입장에서는 딸이 그 시원하고 예쁘고 동그란 이마를 확 열어젖히고 다니면 참 좋으련만, 절대로 이마를 열지 못하겠다며 이상하게 앞머리를 내리고 다닌다.
주말 내내 협상을 통해 갈래를 만들긴 했으나 여전히 부모의 마음속에는 예전의 깔끔하게 올려 묶은 사과머리가 너무나 보고 싶어진다.
학교를 다녀왔다고 언제나 전화하던 아이는, 이제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어간다. 그렇게 죽고 못사는 아빠였으면서 이제는 전화하면 공부 중이라고 한다.
딸이 중학생이 되면, 신경써야 할게 더 많지만, 다행히 지금은 학교와 학원에 집중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절대 그렇지 않을거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은 나의 날카로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가끔씩 초콜렛을 주고 받으며 힐끗거리며 만났던 중학생 성당 동생도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3년간 그렇게 초콜렛을 주고 받으면서 가끔씩 만나 공부 얘기를 했는데, 풋풋했던 만남은 90년대의 고등학생이었을 때가 끝이었던 것이었다.
지금의 중학생과 그때의 중학생을 비교한다면, 정말 너무나 가슴이 쓰릴 정도로 달라 보여, 가끔씩 지금의 이 시절이 너무나 싫어진다.
이제 갓 중학교 1학년하고도 3월을 지내온 딸,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중학교 생활에서 아직은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보여 기분이 좋다.
앞으로 중학교 3년을 잘 보내는 것은 물론, 중학생일때만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소중한 추억은 영원히 어느 것과도 바꾸지 못할 나만의 보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