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001. 쿄이의 시선 [8월의 크리스마스]
essay 003. 쿄이의 시
따뜻함이 뜨거움보다 더 오래 남는다. 내 기억 속에 누군가가 살고, 누군가의 기억에 내가 오래도록 머물 수 있다는 건 먹먹하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다. 정원은 다림과의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났고, 다림은 그런 그를 추억하게 되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사랑과 시간,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한부인 주인공만으로도 슬퍼지는데, 그런 이의 사랑이라니. 얼핏 이야기만 들으면 맥이 풀리지만, 영화는 정원의 사랑을 담담하고 따뜻하게 담아낸다. 정원의 빨간 오토바이와 다림의 빨간색 유니폼, 빨간 티코,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초원 사진관'의 간판. 영화 내내 나오는 붉은색 오브제들은 마치 정원이 "난 죽어가는 게 아니라, 남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하는 거 같다.
영화를 보면 만든 사람의 '시선'이 느껴진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볼 때 역시 '허진호' 감독의 세상에 대한 시선과 그가 영화 속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사려가 느껴진다. 그는 신파로 빠지기 쉬운 소재를 절제된 연출을 통해 잔잔한 드라마로 만들어냈다. 작품을 보는 동안 정원의 시간을 따라 사부작사부작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짐작건대 이미지로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에서 이미지와 서사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늘 의견이 분분하다. 모두 더하고 덜함도 없이 중요하기에 참 의미 없는 논쟁이지만, 굳이 꼽아야 한다면 이미지라고 본다. 텍스트 없이도 이미지의 결합만으로 내용을 알아가는 게 영화를 보는 묘미 중 하나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정원의 상황과 마음을 대사로 줄줄 설명하지 않는다. 함축된 장면들로 얼마 남지 않은 정원의 시간과 다림을 향한 그의 마음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 또다시 주차 단속 사진을 맡기러 온 다림에게 정원이 선풍기를 틀어주는 장면이 있다. 정원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카메라는 그가 선풍기를 틀자, 다림의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마침내 액자가 걸린 벽을 뒤에 두고 두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을 때, 카메라는 멈춰 선다. 그때 프레임 중앙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정원의 '그림자'다. 정원의 긴 뷰잉룸(viewing room)에 위치한 그림자. 다림과 가까이 닿아 있는 정원의 그림자는 다림에게 서서히 스며드는 그의 마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죽음을 앞두어 그녀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정원의 상황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의 옆에서 열심히 돌아가는 선풍기는 너무 뜨거워지지 말라고 마음을 식혀 주는 거 같기도 하다. 벽에 걸린 액자를 반듯하게 평각으로 보여주던 초반 장면과 달리, 후반에는 인물들의 투 샷을 측면에서 잡아 배경의 액자들이 살짝 비뚤게 보이도록 한다. 미세한 차이지만, 중요한 그들의 투 샷에 굳이 여러 액자들이 비뚤게 보이도록 한 까닭은 사진이 가진 '추억'이란 상징성 때문이라 본다. 이로써 오직 과거 기억만을 가지고 떠나야 하는 정원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선선하게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 나풀거리는 머리칼은 어쩔 도리 없이 오고 가는 두 사람 사이 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관찰자로서 인물들에게 거리를 둔 카메라는 관객들이 직접 장면을 읽어내며 주인공을 따라가게 한다.
감독의 여러 작품을 봤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 유독 박광수 감독의 영화가 떠오른다. 허진호 감독은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을 주도했던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에서 영화를 배웠다. 그 때문인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8월의 크리스마스> 모두 유영길 촬영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는 여공이 각혈로 인해 일하다 말고 공장을 뛰쳐나오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그런 여공을 가까이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놀란 전태일이 뒤따라 나오자, 카메라는 아예 공장 계단에 앉아 있는 여공 뒤로 빠지며 그들의 모습을 관망하듯 보여준다. 대사는 단 하나, "손 닦을 곳이 없어요."뿐이다. 손에 묻은 피를 클로즈업하지도,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안 보여주기'와 '거리두기'를 통해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도록 한다. 때문에 연출자에 의해 주입된 감정으로 너무도 가볍게, 그리고 쉽게 캐릭터를 연민하지 않게 된다. 씬이 전환될수록 켜켜이 쌓여나가는 캐릭터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내가 스크린 속 그들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두 감독의 작품 색깔은 전혀 다르지만, 영화에 담긴 사려는 고스란히 닮아있다.
켜켜이 쌓이는 감정선. 각 캐릭터들의 감정이 이미지와 장면에 조금씩 조금씩 쌓여 갈수록 그걸 보는 관객의 감정도 함께 쌓여간다. 늘 덤덤하던 정원이 펑펑 우는 것을 보며 '그래, 그냥 막 울어도 괜찮다.' 위로하고, 갑자기 끊긴 정원의 소식에 사진관 창을 깨버리는 다림을 보며 그녀와 함께 느꼈던 답답함이 조금은 풀리다가도 어딘가 애잔해진다. 이렇게 캐릭터들과 함께 공유한 감정들은 영화가 끝나면 휘발되어 버리지 않고, 여운으로 남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된다. 정원과 다림이 서로를 자신의 시간 속에 간직한 것처럼, <8월의 크리스마스>란 작품도 관객들의 시간 속에 남을 것이다. 그것이 '시네마'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