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임종을 통해 깨달았던 바를 잊고 사는 나를 반성하며
초등학교 때 편찮으신 엄마가 1년간 서울 병원에 계셨다.
그 때 할머니가 나의 엄마 자리를 대신해주셨다. 입히고 재우고..
하루는 체육 시간에 맞기도 힘들다는 새 똥을 맞아 울면서 집에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우리 손녀 괜찮다. 빨면 되재이...~"하면서 맨 손으로 새 똥 묻은 옷을 깨끗하게 빨아주시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1년 뒤 엄마는 앙상해진채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걱정하실까봐 모두들 엄마의 병명은 비밀로 했지만
1년이라는 긴 시간의 말미쯤 엄마가 말기암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할머니가 밥 한 숟깔 뜨지 못하시고 가슴을 치시며 통곡하셨다.
할머니는 일평생 한글 자음과 모음은 'ㅏ'밖에 모르셔서 tv에 뜨는 자막을 한 줄 읽다보면 어느새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고는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셨던 프로그램은 화면만 봐도 이해되는 저녁6시에 하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한글을 모르는데 한이 맺혔던 할머니는 가끔씩 'ㅏ'외의 모음을 공부하시고는 하셨지만 늘 깜빡하시며 한글을 모르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고는 하셨다.
내가 대학생때, 할머니는 내가 선생님이 되어 좋다고 아직 학생인 나에게 손녀의 이름 대신 "강 선생님"하며 연신 불러대셨다. 때로는 일제시대 할머니의 할머니가 할머니를 데리고 피난 가던 이야기, 일본 사람들이 너무 무서웠다는 이야기, 한국 전쟁 때의 이야기 등 할머니가 베갯머리에서 들려주던 이야기에서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도 옛날엔 누군가의 딸이었고 손녀였구나..라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내가 선생님이 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할머니가 간암 말기에 걸리셨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건너편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여보면 엄마는 밤새 한 숨 못 자고 "엄마~~"하며 목 놓아우셨다. 다음 날 아침에 보면 이불이 축축히 젖어있고 엄마의 베개 옆엔 항상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 놓여있었다. 그렇게 첫째의 역할을 다 하고 싶다는 엄마는 이제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를 보살펴드리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 날이 갈수록 할머니의 배는 점점 부풀어져갔다. 할머니를 모실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오자,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눈과 비를 뚫고 병원에 계신 할머니께 갔다.
몇 번의 마음의 준비 끝에 새벽에 할머니가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식에 엄마는 주저앉았다. 나도 세상이 온 통 하얀색이 된 것 같았다.
누군가의 임종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딱딱하게 굳어 수의를 입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돌아가며 인사를 했다. 인간의 일평생이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얼마 되지 않는 인간의 생 속에서 서로 미워하고 괴로워하며, 욕심을 내며 살고 있구나..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이 다 초연해지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고민들이 눈물로 휘발되어 할머니께 꼭 열심히 잘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할머니를 어렵게 보냈다. 세상에 모아두었던 눈물을 다 쏟아부었던 날이었다. 할머니를 장지에 묻는 날 소 우는 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허무하디 짧은 인생 속에서 꽃 피우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나의 다짐은 5년 뒤 어디로 흘러가버린 것일까. 인간의 생의 주기가 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영원할 것 같기에, 사람과 사람의 복잡한 세상속에 살면서 그후로 다시 수많은 숱한 고민과 번뇌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의 임종 앞에서 느꼈던 그 가슴 아픈 기억들, 다짐들을 떠올리려 한다.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도 시간의 무한함을 느끼기에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저를 용서하소서.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의 상태가 되어 그야말로 하얀 세상 속에서 늘 정진해야겠다. 욕심내고, 미워하며 살지말아야겠다.
1년내내 할머니와 함께했던 곰탕 냄새가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