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태도가 바뀌니 내 직업이 좋아지다!
나의 본디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이제 10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매일 아침 7시마다 기상해서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게 일어나야 할까? 사는 게 다 이런 걸까?’ 하는 마음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씻으러 갔다. 학교에 도착해 차에서 나와 학교정문까지 늘 힘없이 터벅터벅 걸었던 것 같다. 그렇게 10년 안에 그만두고 다른 직업으로 전향하고야 만다는 내가 10년째 때 이제 학교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싫어하게 된 제일 큰 계기는 학부모 민원이었다. 아침저녁 주말 할 것 없이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도 너무 불안 지수를 높였고, 1년간 나에게 악성 민원으로 한 부부가 괴롭혔는데 그때 이후로 새벽 5시까지 잠을 못 자서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 후로 언제까지 내가 이 불안감에 시달려야 할지 몰라 학교를 꼭 탈출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내 귀에 자꾸 진동 전화소리가 계속 울릴 때쯤이었다.
두 번째로 이 직업을 싫어하게 된 계기는 너무 막중한 업무 때문이었다. 업무가 작은 선생님들도 계시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맡은 업무마다 양이 방대해서 쉬는 시간에 한 번 쉬어보지 못하고 매일 행정실, 교감 교장실을 뛰어다니기 바빴다. 그렇게 업무에 시달리며 수업준비보다 업무에 치중하는 시간이 더 많을수록 내가 가르치는 본업에 집중하지 못할수록 나의 회의감은 날로 커져갔다.
세 번째로 내가 교직을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이상한 동료 교사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나랑 동학년도 하고 7년째 같은 학교에 일하고 있는데, 그 남자 교사가 유부남이었는데 “이건 농담이지만, 오해하지 말고,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선생님이랑 잘해 볼 수 있었는데.” “선생님 같은 몸매에 복근까지 있으면 와~ 어쩌려고 그래요?” 등 성희롱을 했고, 밤마다 주식 정보를 준다고 전화 오거나 내 교실에 매일같이 찾아왔다. 그리고 일은 매일 자기 일이 힘들고 바쁘다고 대신 좀 해 줄 수 있냐고 해서 내가 학년 부장도 아닌데 학교 업무뿐 아니라 학년의 일을 다 했다. 그 유부남의 얼굴이 아침마다 계속 거울에 떠오를 때면 너무 화가 나서 ‘내가 아침부터 왜 그런 사람 때문에 늘 화가 나야 하지?’라며 얼굴이 붉어진 채로 화장을 하고는 했다. 결국엔 그 유부남에게 내가 “저희 교실에 오시는 것도 부담스럽고, 밤늦게 주식 정보 알려주신다고 전화 오시는 것도 너무 싫고 앞으로 안 그러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용기 내서 말하기까지 딱 4년이 걸렸다. 지금의 성격이라면 며칠도 안 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튼 주위에 나는 본받고 싶은 멘토보다는 오히려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사람밖에 없으니 속이 썩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매해 맞는 아이들에 따라 교사의 1년 운명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매일 우는 아이, 급식 시간에 급식실에 가지 않겠다고 교실에서 버티고 있는 아이, 매일같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누군가와 싸우는 아이, 여학생들을 돌아가며 이간질시켜 따돌리는 무리, 수업 시간에 주의 집중을 잘 못 하는 태반의 아이들, 학원에서 배워서 다 알고 있다고 으스대는 아이들 등 모든 각양각색의 아이들의 문제를 다루는데 하루가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끊임없이 오는 공문처리, 각 선생님이 맡은 업무별로 협조해 달라고 계속해서 깜빡거리는 메시지 표시, 쉬는 시간마다 울려드는 교실 전화기 등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교사는 멀티가 되어야 했다. 나는 애초에 멀티가 잘 되지 않던 사람이라 그 모든 게 나를 너무 정신없게 만들고 불안지수를 하루하루 치솟게 했다.
그래서 늘 퇴근하고 나면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어 바로 잠에 들어 새벽에 멀뚱멀뚱 깨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교사 탈출을 위해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워 실천해야 함을 느꼈다.
첫 번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자 시계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몰입이 되어 내가 캔버스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 적성을 살려 미술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였으나, 단지 좋아하는 것과 뛰어나게 잘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 같았다. 미술 대학원에 가려면 더욱더 쟁쟁한 동료들 속에서 경쟁을 해야만 했는데,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두 번째, 유학을 가기 위해 영어 공부를 갑자기 열심히 했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제일 좋아했던 과목이고 나는 해외에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렇게 영어 공부를 성실하게 했으나, 1년에 학비 및 생활비가 1억이 든다는 유학원의 상담 전화를 듣고는 내 형편에 바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스튜어디스 학원에 다녔다. 나이와 키를 보지 않는다는 항공사를 마음에 두고 매주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스튜어디스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직 아기 같은 20대의 아이들 사이에 섞여 나는 맏언니가 되었다. 그게 올해 2월의 일이다. 34살이 아직 합격한 경우는 없다고 해서 내가 신화를 보여주려고 했으나, (원장님과 강사님도 나를 보자마자 한 번에 붙을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마침 그때 전 남편을 소개팅으로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되면 스튜어디스 일을 하면서 가정에 충실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려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다.
그렇게 나는 교사 탈출을 위해 완벽한 듯 완벽하지 않았던 계획과 시도를 하였으나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닭장 속의 암탉이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며 꿈을 품으며 살다가 한 번도 닭장 밖을 못 나가 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 이혼이라는 큰 시련을 겪게 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인생에 이보다 더 아프고 힘든 경험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든 날부터 아침 6시에 눈을 뜨면 더 자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 그 개운함으로 학교를 출근하면 학교 건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리고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인해 아이들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것.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보람찬 일인가. 매일 정신없이 바쁘지만 내가 맡은 업무로 인해 내 계획대로 학교가 움직여 간다는 게 얼마나 내가 대단한 사람인가. 민원으로 인해 내가 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올해는 다 좋은 학부모님들을 만나 늘 나를 격려해 주시고 감사하다고 해 주시는 인연이 얼마나 고귀한가. 그리고 내가 싫으면 싫다고 내 의사를 분명히 말할 줄 알게 된 사람이 된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가르침으로 인해 “아~”라며 새로운 앎을 깨닫는 아이들의 소리가 얼마나 뿌듯한가.
그렇게 내 발걸음은 달라졌다. 힘없던 발걸음에서 씩씩하게 학교를 행진하며 나아간다. 내가 달라진 게 정말 많이 느껴진다.
얼마 전 아이들과 놀이공원 현장체험 학습을 갔는데, 아이들의 소원이 나와 놀이기구를 같이 타는 것이라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은 미안하지만 거절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어느새 아이들의 해맑은 눈을 보고 거절하지 못해 놀이기구를 하나둘씩 함께 타고 있었다. 정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무서웠지만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매 순간들이 너무 소중하고 값졌다. (그리고 내가 어찌 제어 할 수 없는 힘으로 빠른 속도로 움직여대는 놀이기구를 타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살고싶었다. 내가 살고싶단걸 간절히 깨달았다.)아이들이 그날 뭐가 제일 재미있었냐고 물어보니, ‘무서워서 소리 지르는 선생님이 제일 재미있었다’고 했다.
나는 순수한 동심이 살아있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직업 환경인가. 아이들은 아무리 어른 흉내를 어설프게 내도 순수한 아이들일 수밖에 없다. 그 아이들 마음에는 다 사랑을 받고 보듬을 받고 싶은 어여쁜 화분이 각자 하나씩 있다고 믿는다. 난 그 화분에 매일 물을 주고 가꾸어준다. 그리고 내 마음에도 돌보지 못했던 화분에 조금씩 영양분을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내 직업을 사랑하기로 했다. 하루하루의 발걸음이 즐겁다. 큰 일을 겪고 난 후 나는 더 단단해진 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