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몇 프로일까?
나도 원래는 밝은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때는 늘 반장을 도맡아서 하고 남자아이들이랑 학교를 마치면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는.
그런데 어느 순간 끝없이 찾아오는 많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끊임없이 나에게 성숙함을 일찍 갖게 해 주었고, 이 힘든 시간들을 혼자서 무수히 견뎌오고 누르면서 말 수가 점점 없어졌다. 늘 웃고 다니던 내 얼굴에서 1년에 몇 번 웃어보는지,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웃어 본 적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로 웃음은 사라지고 ‘그래 인생이 그럼 그렇지. 그냥 지금 이 순간 아무 일도 안 생겼으면 좋겠다.’라는 덤덤함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늘 말했다. “왜 너는 그렇게 늘 힘들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힘든 것을 자처하는 거다. 세상에 안 힘든 사람 알고 보면 별로 없다.” 그러고는 연락이 멀어지거나 자기들끼리 즐겁게 지낸다. 한 때는 나도 나 스스로 정말 힘들게 만드는 줄 알고 혼자서 자책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이제는 말하고 싶다. “나랑 똑같은 인생을 겪어보지 않은 이상 그건 아무도 몰라. 나는 똑같은 일을 겪더라도 너보다는 더 잘 이겨내고 이까지 온 거야. 그러니 아무 평가와 판단도 하지 마.”
잘 이겨내서 살아보려 하면 정말로 또다시 원치 않는 밀물이 밀려온다. 좋은 책도 꾸준히 읽고, 그 내용을 한 자 한 자 정성 가득 필사도 해보고, 기도도 명상도 열심히 해보았지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일들은 내 힘으로 막을 수가 없다. 이제는 면역이 되었겠지 싶어도 또 다른 유형의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내 정신을 침투한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부모가 아이들의 상태를 걱정하며 상담을 하는 등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어른은 스스로 그 문제들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쏟아진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난처한 상황이나 위험한 상황에 누군가 보호해주고 대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학부모는 조금이라도 교사의 활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무실에 항의를 했다가, 국민 청원에 민원을 넣기도 한다. 학교는 늘 긴장한다. 이제는 교사도 학부모의 감시 속에 사는 것 같다. 어떤 말이나 행동이든 아이들과의 활동에서 나의 의지대로 밀고 내 교육관대로 확신에 차 밀어 부쳐야 하는데, 워낙 다양한 민원에 시달리다 보니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민원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싶어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미연에 다 방지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힘들다고 하면 “직상 생활을 안 해봐서 그렇지. 직장 생활은 그 보다 더 힘들어. 교사는 방학도 있고 퇴근도 빠르고 복에 겨운 소리 하지 마라.”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 누구든 똑같이 겪어봐야 안다. 학교생활 1년만 해봐도 그런 말이 나올까 싶다. 끊임없이 수십 명의 반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벌어지는 대부분의 상황을 눈에 넣고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늘 줄타기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건넌다.
무엇보다 요즘에는 내가 ars고객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자녀의 학교생활의 맥락과 상황을 다 무시하고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하며 교사의 모든 활동에 의심을 갖고 태클을 거는 무례한 학부모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주말 밤낮 가리지 않고 전화가 와서는 ‘선생님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상처 주는 말들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이제는 ‘선생님에게 앙금이 많다.’라는 말을 하며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여태껏 아이에게 칭찬하고 관심 주고 세심하게 살펴주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다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다. 이제는 상처를 안 받으려 하는데, 끊임없이 그 말투와 무례함이 파고들며 생각나게 한다. 자다가도 꿈에 나오고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깜짝 놀라서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철렁거린다. 나도 화낼 수 있고 소리 지를 수 있는데, 일이 커지면 학교에 피해가 갈까 봐 늘 참는다. 왜 교사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에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걸까. 왜 우리는 늘 조용히 잘 넘어가기 위해 잘 무마하고 참으며 어떻게든 친절하게 전화를 끊어야 하는 걸까. 나 대신 전화를 받아주는 천하무적 슈퍼맨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며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직장 생활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참으며 살아가는 걸까. 열심히만 살았을 뿐인데, 지금껏 수만 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몰려오다가도 이제 와서 뭘 하며 다시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의 인생사가 다 그런 것일까. 인간은 왜 태어난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몇 프로쯤 될까? 열심히 경쟁하며 스펙이나 성과 중심으로 점수가 매겨지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게 있을까? 왜 열심히 산 사람에게 끊임없이 또 열심히 이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을 계속해서 주는 걸까.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밀물과 썰물, 지구의 자전 등 자연현상들과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를 아픈 화살들. 그 화살들로 내가 또 단단해지고 이겨내려면 어떤 시간과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오랜만에 입술을 너무 많이 물어뜯어서 입술이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성치 못하게 되었다. 하늘이 뿌린 다양한 씨앗들이 다른 모양의 풀꽃으로 살아간다. 오늘은 연리지 나무가 떠오른다. 그토록 살아남기 힘든 환경 속에서도, 척박한 절망 속에서도 또 다른 자연이 나무를 품어주어 새 생명을 더욱 견고하고 위대하게 탄생시킨다. 혼자서 걸어가는 막 다른 길에서도 손을 뻗어주는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다.
관계에 지쳐 외롭고 싶지만 끝없는 외로움이 싫은 인생의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