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 숨어 온 그녀.

인연은 우연 속에 숨어서 온다.

by 글하루

우연에 숨어 온 그녀.


두세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멍했던 시간은 높은 절망을 넘어 현실의 시간에 내려앉아 있었다.

현빈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

무언가 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현빈은 무언가 하고 있었다.

집중을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시간을 지나야 무언가 나오는 것이 현빈의 일상이었다.

이런 시간을 지나야 노트북에 그 몇 자락 흔적이 글로 남는 것이다.

우주의 공간 같은 공허의 시간을 지나야 행성에 도착하는 것이다.


커피잔에 손이 옮겨지는 순간, 현빈의 핸드폰에 낯선 번호가 찍혔다.

모르는 번호면 잘 받지 않는 현빈이다.

수많은 연락마다 일일이 반응을 하다가 내 생활이 희미하게 없어지는 것이다.

창작은 예민해서 이런 작은 핸드폰 문자에도 무너져 버린다.

모르는 사람의 연락은 내 생활에 침투하는 느낌이다. 수상하다.

얼마 있다가 또다시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하지만 궁금증이 살짝 먼지처럼 일어났다.

중요한 전화면 다시 하겠지 생각했다.

다시 오면 받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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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시간이 지나서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해림 출판사의 손예진입니다.

방송국 김형석 PD님께 작가님의 핸드폰 번호를 받아서 연락드립니다.

노래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인데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바쁘신 것 같아 오후 3시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그때에 전화를 받지 않으셔도 바쁘신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그 시간에 전화가 가지 않는다면 그때는 제가 바쁜 걸로 …. 하하

이따 연락드릴게요. 수고하세요 …"


그러고 보니 언뜻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아는 선배인 김형석 PD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아마 연락이 한번 갈 거야, 만날지 말지는 알아서 하고..."

사람들이 괜찮다고 했다.

웬만하면 괜찮다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 괜찮다고 하니 일차관문은 쉽게 통과한 셈이다.


문자는 적당했다. 아니 맛이 있었다. 할 말 다 하는 간결함과 재치, 배려, 다 좋았다.

이런 걸 첫인상이 좋다고 한다.

음식이 나왔을 때 한입 먹어보면 안다.

맛있다. 맛없다는 순간이다.

딱 보았을 때 자신을 덮쳐버리는 그 광대한 파도를 본능적으로 알아버리는 그 무엇이 첫인상이다.

첫인상에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경험이 DNA에 녹아서 보호막을 쳐 준다.

이건 좋다. 나쁘다. 위험하다. 안전하다. 앞으로 힘들겠는데, 정말 기대되네.....

아주 순간이지만 많은 말들을 해주는 그 느낌이 어느 길목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이정표가 되어 주기도 한다.


과한 것도 싫고, 모자란 것은 더욱 싫어하는 현빈이다.

대개 적당한 것은 치우치지 않아서 느낌이 좋다.

하지만 그 치우치지 않은 적당함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균형점이다.

현빈은 글쓰기가 외줄 타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줄 한 줄의 외줄에서 수 없이 떨어져 본 작가는 그 균형의 어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시간이 흘렀다.

시계를 보니 2시 58분

현빈은 자기도 모르게 괜스레 웃었다.

자신이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니….

기다린다는 것, 참 오랜만의 감정이다.

59분이 지나고 3시가 스치듯 지날 때 핸드폰이 울렸다.


빨리 받으면 좀 어색해서 조금 기다렸다.

성급하지 않고 과하게 늦지 않은 적정점의 어느 순간을 잡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현빈이 말을 했다.

" 안녕하세요 해림 출판사의 손예진입니다. 전화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 네 지금은 괜찮고 앞으로도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시지요?"

현빈은 내심 놀랐다. 자신이 농담을 하다니....

농담은 그에게 잊혀진 단어 중에 하나였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면서 예진과 통화하던 현빈의 얼굴이 굳어졌다.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톤이 미세하게 달랐지만 구름이 드리웠다고 태양이 뜬 낮이 밤이 될리는 없다.

희미하게 들리던 음악소리가 볼륨을 높이면 선명해지듯이 대화를 나누면서 기억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생각이 났다.

김지원!

현빈은 순간 쾅하고 의자를 밀치며 일어서고 말았다.

방안 가득히 벼락이 쳤다.


그 잊을 수 없는 이름, 온 마음으로 사랑한 여인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 하지만 이 세상에 없는 사람

그녀는 현빈의 삶에서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죽어 있었고

그 사랑을 잃은 이후로 현빈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 그래서 한번 만나서 작사에 관한 책을 만드는 것을 상의했으면 하는데 언제가 시간이 좋으실까요?"

침묵이 흘렀다.

"여보세요?"

예진은 순간 대답 없는 침묵에 당황했다.

현빈은 혼란 속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현빈이 말했다.

"아 예 여보세요.."

예진이 다시 말했다.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언제 시간이 편하실까요?"


현빈이 떨리는 목소리를 꾸욱 누르고 또박또박 말했다.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다가 천천히 호흡을 뱉으며 말했다.

" 지금요 " 현빈이 말했다.

" 네? " 예진이 당황했다.

" 지금 만났으면 합니다."

" 네? 지금 당장요?"

" 네 지금 당장요."

전화기 너머에서 예진이 허둥댔다.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소리가 들렸다.

" 조금 있다가 회의가 있어서 제가 조정해 보고 바로 전화드릴게요 "

" 아니요, 회의는 그냥 하세요.

어디인지 알려만 주시면 제가 그리로 출발하겠습니다. 기다리면 됩니다. 회의 끝날 때까지 "

"네?"

" 괜찮으시지요.. 지금 가는 거?"

" 네 오히려 죄송해서 그러지요. 갑자기 지금 여기까지 오신다고 하시니…"

" 저도 시간이 항상 있는 게 아니라서요, 다행히 지금이 딱 좋은 시간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힘들거든요."

잠시 예진이 머뭇거렸다.

" 네 알겠습니다.

주소와 약도는 지금 바로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현빈은 묵묵히 대답했다.

" 네, 도착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현빈은 힘차게 자신의 재킷을 움켜쥐고 바로 일어섰다.

그의 행동에는 단 한 톨의 망설임도 있지 않았다


그때 현빈의 방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지금 회의하실 시간입니다. 다 모여 있어요."

현빈이 성급히 나가며 말했다.

"아 정말 미안한데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내일로 미뤄주세요,,, 아 여기...."

현빈은 지갑에서 자신의 카드 한 장을 꺼내어 주었다.

"이걸로 오늘 회식들 마음껏 하고요... 정말 미안.... 정말 급한 일이라서.... 이건 미안한 내 마음입니다."

번개처럼 카드를 쥐어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뒤로 카드를 보고 현빈을 보고 계속 반복하는 한 사람이 남아 있다.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소고기 먹어도 돼요?"

현빈이 손을 흔들었다.

희미한 메아리 같이 들리는 소리.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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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은 급히 편집장에게 보고했다.

" 현빈 작가님이 지금 여기로 온다고 하는데요."

편집장이 안경을 벗으며 말을 했다.

" 이렇게 빨리, 갑자기?"

" 그러게요. 내 목소리가 예뻐서 그러나 봐요, 목소리가 이쁘니 얼굴도 이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

예진도 자신의 말이 우스운지 웃어 버렸다.


현빈이 이리도 급하게 여기에 오려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편집장이 고개를 오뚝이처럼 천천히 기웃기웃거렸다.

" 뭐예요 그건, 끄덕끄덕 긍정도 아닌 것이, 도리도리 부정도 아닌 것이, "

" 잘 봤네 부정하자니 예쁜 거는 인정해야겠고, 저 자신감은 얄미워서 인정을 못하겠고, 딱 중간, 부정도 긍정도 아닌 딱 중간이란 나의 의사표현이야."

예진이 팔짱을 켜며 말했다.'

" 이해해요, 중년은 왔다 갔다 시계추 같은 나이니까 공감이 되네요."

예진이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현빈은 최대한 빨리 왔다. 아니 날아서 왔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다. 그냥 붕 구름을 타고 손오공처럼 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다.

여기에 오는 동안 마음은 벌써 이곳에 와 있었지만 꿈보다 현실은 너무 느렸다.

도착한 지금은 성급함을 뒤로하고 침착함을 앞세워야 한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숨을 잠시 참으며 산소를 폐 속 깊숙이 가슴에 꾹 밀어 넣었다.

조급한 마음을 깊은 심호흡으로 달랬다.

숨을 " 후우 " 하고 길게 뱉어내고는 전화를 걸었다.


" 도착했습니다, 10층이라고 하셨지요? 10층으로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

평상시의 현빈이라면 " 지금 올라가도 될까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상시의 현빈이 아니다.

현빈의 몸은 1층에 있어도 마음은 이미 10층에 도착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평상심을 너무 깊이 숨겨버려서 찾는 것이 힘들다.

조급한 마음이 평정심을 저 멀리 어딘가로 보내 버린 것이다.

현빈의 마음속에는 혹시 하는 마음이 새벽안개가 거리를 덮듯이 온통 마음을 채워 버렸다.


현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거라고 생각한 예진은 10층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계단 쪽에서 한 남자가 성큼 뛰어왔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순간 둘의 눈동자에는 둘의 마음이 그대로 쓰여 있었다.

놀라움

한순간에 알아본다는 말. 그 놀라움의 순간.

서로는 서로를 알고 있다. 하지만 완벽히 모른다.

현빈은 예진의 모습에 놀랐다.

그녀는 손예진이 아닌 김지원이었다.

그리고 예진도 깜짝 놀랐다.

그때 그 사람인가!


현빈이 사랑했던 단 하나의 운명이자 사랑.

하지만 그녀는 지원이 아닌 손예진이었다.

예진은 현빈을 바라보았다.

예진은 순간 현빈의 모습과 그때 커피솦 창가에서 바라보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다.'

그때 커피숍 창가에서 바라보면서 자신의 두 눈에 알게 모르게 새겨진 사람

혹시나 했던 그 모습, 그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이 그 남자의 애잔한 마음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들게 했던 사람

눈 떼지 못하는 그때의 그 모습에 자신의 마음은 책갈피 꽃은 것처럼 그 페이지에서 놓여 있었다.


예진은 자신이 신기했다

오래전에 아주 잠깐 보았던 사람을 지금 본 사람처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서로는 서로를 처음 보았고, 서로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리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책을 읽고 덮으면 책을 읽었어도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놀라움이 순간으로 스치고 둘은 정신을 집중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 안녕하세요 현빈입니다. "

" 안녕하세요 손예진입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둘은 회의실로 들어갔고 바로 편집장과 마케팅팀장이 들어왔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작가, 시인이면서 작사가인 현빈은 얼굴 없는 작가로 이 바닥에서 유명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보증수표였다.

어떤 책을 내도 좋은 책이 나온다는 믿음이 있었다.

실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연락을 했는데 단번에 여기에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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