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우연으로

오늘밤 나를 읽어줘

by 글하루

깔끔한 미팅룸이다. 밖으로 시내의 모습이 광활하게 막힘이 없이 펼쳐져 있다.

멀리 날아가는 새가 나의 눈높이에서 있다. 그 모습을 보면 괜히 새가 된 것처럼 자유

를 느낀다. 무언가 느낀다는 건 잠깐 또 다른 세상에 있는 별천지이다.

잠깐의 일탈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이런 곳에서는 커피 한 잔이 잘 어울린다. 커피 향

이 도시 전체를 덮어주는 느낌이 든다.

서로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편집장 권오형입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현빈입니다. 갑자기 찾아왔는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이런 갑자기는 저희가 감사하지요. 자 편히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본론에 앞서 몸 푸는 말들이 오가며 분위기를 만들었다.

100미터를 뛰기 전에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풀듯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여유 있는 마음을 위해 덕담이 오갔다.

말이 부드러우면 봄도 빨리 온다. 배려의 말속에 긴장감이 풀리며 무언가 기대가 새싹

처럼 돋아 났다. 편집장은 출판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현빈과 어떻게든 함께 일

을 하려 했다.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하나하나 풀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하지만 사실 현빈은 책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예진에게만 눈이 자꾸 갔다. 계속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스치듯 집중

하며 눈에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그 스치는 잠깐의 0.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서 현빈은

영원처럼 멈춰 서서 내심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지.'

현빈이 보기에는 쌍둥이가 아닌 그냥 똑같은 한 사람이었다. 닮았다는 말은 거짓말이

었다. 지금은 지원이 내 앞에 바로 앉아 있는 듯했다. 반갑고 신기하고 혼란스러웠지만

들키지 않고 잘 숨기고 있었다.

이미 이곳에 올 때부터 현빈은 어떤 제안이 오더라도 들어주기로 내심 생각하고 왔었

다. 어떻게든 함께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현빈에게, 어떻게든 함께 일하고 싶은 편집장

의 말은 현빈의 머리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현빈이 계속 긍정의 메시지를 무언의 말로

전하자 편집장은 내심 흥이 났다. '잘 되어 가고 있어.'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더 이상 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드렸듯이 이번에는 한번 노래와 작사에 관한 책을 한번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현빈의 스토리와 함께 작사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과 곡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스토

리가 어우러진다면 그 엮어진 이야기가 하나의 훌륭한 책이 될 것이다.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인 현빈이 출판사의 눈에 띄었음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

금의 현빈은 출판사 날씨로 치면 비가 온 뒤에 먼지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인 것이다. 이

하늘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은 것이다. 노래가 글에 앉은 현빈의 글은 다른 작가와

다른 색깔이 있었고, 독자층이 두꺼웠다. 그리고 누가 봐도 멋진 외모는 좋은 이미지에

한몫을 했다. 저 얼굴에서 저런 글이 나오는 것은 사기였다.

그 침묵 속에서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그런데'는 좋지 않다.

갑자기 편집장이 침을 작게 삼켰다.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던 현빈이 말을 꺼냈다.

" 자세한 것은 차차 일을 진행하면서 상의하면 좋을 듯합니다.

궁금한 것은 이 일을 진행하며 제가 누구와 상의하면 되겠습니까?"

"보통은 예진 씨가 담당을 하지만 현빈 작가님은 편집장인 제가 직접 챙기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현빈 작가님의 팬이기도 하고요. "

현빈이 웃으며 말했다.

" 네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는 부담이 됩니다. 일이야 잘 되기를 바라면

서 하지만 만약이란 것도 있으니 말입니다. “

그리고 미소로 말을 끊고 잠시 침묵 속에서 생각하다가 현빈이 말을 이었다.

" 저는 그냥 예진 씨와 일에 대해서 상의하면서 진행하고 싶습니다. 처음 통화해서 시작

한 것도 예진 씨였으니 마무리도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누가 뭐라고 토를 달 수 없었다.

침묵 뒤에 나오는 말은 마음의 칼을 갈고 나온 말이기에 함부로 막을 수 없다.

"네 그럼 앞으로 예진 씨와 상의하며 잘 진행 부탁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회의는 마무리되었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커피 한잔씩 들고 옥상공원으로 가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커피 향기가 더해진 두 사람의 대화는 평온했다.

둘의 사이에서 커피 향이 맴돌았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숲 속 길을 산책하듯 두 사람의 마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 왜 저예요? 저보다 더 뛰어나신 편집장님이 낫지 않아요?" 예진이 물었다.

" 왜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현빈이 대답했다.

" 그건 아니지만…."

말꼬리는 짧아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헤매었다.


현빈이 뜬금없이 물었다.

" 지금부터 약 3개월 전 9월 15일 수요일 강남역 버거킹 앞 도로, 오후 6시 30분,

오렌지색 원피스를 입고 작은 쇼핑백과 꽃다발을 들고 거기에 있었던가요? 예진 씨가?"

" 갑자기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 한번 잠시만 생각해 보세요"

"3개월 전의 일을 어떻게 생각해요?".
"그래도 한번 생각해 봐요.. 아, 그때 꽃다발도 들고 있었어요. 노란색 꽃다발요."

황당한 현빈의 물음에 예진은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기억의 지팡이를 더듬으며 시간의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


순간 자신의 이마에 잠시 머물러 있던 예진의 눈이 하루를 담아도 남을 만큼 커다랗게 커졌다.

" 어떻게 알아요 그걸…. 그날 10년 묵은 이무기 소꿉친구의 생일모임이 있었어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이번에는 예진이 현빈에게 물었다.

" 그날 저녁 9시쯤, 그 골목 안 주차타워 앞에 큰 화분이 있는 곳에서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면

멍하니 한참을 서있던 사람이 있었어요. 한참을 말이에요, 혹시 그랬나요? 비에 홀딱 젖어서...."

가만히 듣던 현빈의 눈에 온 힘이 들어가며 커졌다.


현빈은 그날 강남역 주변을 온통 한 사람을 찾아다녔었다.

그녀를 찾기 위해서….

꼭 찾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걸음마다에 마음을 담아서 빈틈없이 찾아다녔다.

한걸음마다 기도하며 말이다.

신은 그날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지치고 힘들어서 멍하니 하늘을 끊임없이 바라보던 기억이 났다.

어디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망연자실하던 자신이 그 어느 장소에 서 있었던 사실을 안다.

한차례의 소나기가 펴 붓고 그 비를 온몸에 온전히 담고 서서 하늘만 보았다.

별 하나 없는 밤에 도시 위를 지나는 구름만 멍하니 담았다.

예진은 이 모습을 본 것이다.

허탈한 슬픔에 잠겨 있던 현빈의 모습을 말이다.

현빈 앞에 지금 커피잔을 들고 서 있는 그녀가 말이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기도는 시간을 건너서 오늘 이루어졌다.

현빈은 그날의 기도를 잊은 적 없었다.

그 대답을 지금 주신 것이다.


조심스레 예진의 얼굴을 바라보던 현빈의 눈이 거침없이 예진을 바라보았다.

예진도 부끄럼 한 톨 없이 똑바로 현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빅뱅의 폭발처럼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메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다.

하늘에서 첫눈 하나가 떨어져서 저 먼 하늘을 날아 한치 어긋남 없이 두 사람의 머리에 떨어졌다.

벼락같은 순간은 비록 순간이지만 그 순간은 하늘을 가르기도 한다.

운명은 무엇일까?

만남에 운명이 있다면 무얼까?

현빈은 눈빛으로 물었고, 예진은 그 물음을 눈빛으로 받았다.


현빈은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운전을 하며 저 먼 곳에 시선을 두고는 시간을 거꾸로 달려서 과거의 시간 속으로

지원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사람은 없고 기억만 남은 사랑이지만 살아있는 사랑 속으로 현빈은 달려가고 있었다.

살았어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었어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

지원은 죽었어도 현빈의 가슴에서는 한순간도 죽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살아있는 현빈이 죽어 있었다.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손예진

김지원과 너무도 똑같은 사람

설레었다. 마침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그녀 지원이 생각이 났다.

예진과 같이 있으면서 마치 지원과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좋았을까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좋으면서 헛갈렸다.

하지만 계속 자꾸만 자꾸만 보고 싶었고 눈이 갔다

마음이 가니 생각이 가고 자신의 몸이 그곳으로 갈 것만 같았다.

숲 속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맞는 길을 가고 있을까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는 것 같은 기분

한편으로 어색하기도 했다.


과거의 지원은 현빈 앞에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었다.

예진은 지원의 모습이었지만 완벽히 타인이었다.

따뜻한 눈빛도 없이 손을 잡지 않았고 안을 줄도 몰랐으며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같은 사람이면서 전혀 다른 사람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보고 싶은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하루뿐인 만남 속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마는 벌써 두동 간난 평상심이었다

분명 한낮인데 태양이 달에 가려진 일식같이 낮은 밤 같기만 했다

지원을 저 멀리 보내고 조금은 추슬러진 마음의 호수에 손예진이라는 커다란 운명이 떨어졌다.

파문의 크기를 알 수 없었다.

그 크기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순간은 순간이 아니고 만남은 스쳐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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