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시간 속으로

by 글하루

그녀의 시간 속으로


새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현빈의 고등학교 선배였던 친한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점심때 시간이 있으면 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한 사람이 더 올 거야. 잠깐 얘기하고 같이 밥 먹자.”

고등학교 방송부 선배인 병호형은 교 편집실에서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람 좋은 신뢰 가는 선배이자 자신을 아껴주는 형이었다. 잘 알고 있다는 건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자유를 신뢰라고 부르지 않을까? 병호형은 현빈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수업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날이 좋았고 날이 맑았다.

걷기 좋아서 약속 장소까지 천천히 걸어가야지 생각했다. 약속 장소로 일찍 출발했다.

오래 걸을 생각으로 느릿느릿 음악을 들으며 한 걸음씩 음미하며 걸었다.

길이 맛있다. 봄날의 길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대학 새내기의 기분 탓일까... 천천히 길을 걸으며 봄을 몸 안에 새겼다. 봄바람이 가슴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봄이 나무와 풀에 햇볕으로 바람으로 붙어서는 떠나갈 줄 몰랐다.

‘겨울이 있기는 했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다.

캠퍼스 여기저기에서 꽃들이 피어서 봄을 증거 했다.

봄은 캠퍼스에도 피어 현빈의 눈을 통해 가슴으로 들어왔다.

좋구나.

마음속에서 한마디 튀어나왔다. 아지랑이처럼 피아난 말은 하늘하늘 날아 현빈의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무언가 그렇게 하나씩 내려앉는 말들을 잠깐잠깐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어 적었다.

봄을 글로 모으기에 더 없는 날이다. 잠깐잠깐 그때그때 떨어져 있는 봄을 종이에 연필로 주워 담았다. 이런 즐거움에 펜을 놓지 못한다.


길을 따라 가볍게 걷기가 봄의 증거를 모으는 또 한 사람을 보았다.

다소곳한 꽃들과 눈을 마주치는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사진기를 들고 꽃과 눈높이를 맞추고는 찰칵 인사를 하고 있다.

'예쁘다.'

현빈은 생각했다.

그녀인지, 봄인지, 그녀가 보는 봄인지, 봄을 보는 그녀인지, 하여튼 현빈은 속으로 외쳤다. 현빈은 이 모습을 보고 잠깐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노트를 펴고는 몇 글자 쓰기 시작했다.

노트를 덮고 다시 그곳을 바라보니 아무도 없었다.

순간 보였다가 순간 사라지네, 순간 피고 지는 봄처럼 말이야.

혼자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그녀는 순간으로 피었다가 순간으로 사라졌다.


현빈은 봄 가루를 듬뿍 묻히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응, 잘 지냈어? 얼굴 좋아 보이네. 하기야 네 얼굴이면 나쁠 일이 없지.. 잘생긴 녀석이 멋지기까지 하니 누가 신은 공평하다고 말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현빈은 묻혀온 봄을 털듯 미소로 대답했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화려한 립 서비스 기술을 거시는데요?”

“눈치챘냐? 하여튼 눈치는… 약속시간까지 5분 남았으니 조금 기다리자. 한 사람이 더 와야 해. 너하고는 다르게 립서비스가 필요 없는 사람이야! 그냥 한마디로 이뻐.”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사진기를 둘러메고 그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옆에 분도 안녕하세요?”

명랑한 말투에 웃음이 곁들여졌다.

사라지던 봄을 뒤돌아보듯 또 보고 싶은 미소와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현빈입니다.”

현빈은 눈을 떼지 못하고 일어서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지원입니다.”

지원도 눈을 떼지 않고 인사를 했다.

둘이 인사에 선배가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두 분. 저는 지나가는 선배 1번인가요?

참고로 여기는 소개팅 자리가 아닙니다요. 너무 눈에서 불꽃 튀면 아니 됩니다.”

“네~~”

현빈과 지원이 동시에 대답했다.

하지만 튀어 버린 불꽃은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불씨가 되어 버렸다.


이날 선배에게서 둘이 함께 교내 방송국에 들어와 줄 것을 부탁받았다.

나는 글을 잘 쓴다는 이유로, 김지원은 사진을 잘 찍는다는 이유로… 둘은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에게서는 자신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상장을 받은 듯 뿌듯한 것이다.

봄이어서 좋았고, 대학생활의 시작이어서 좋았고, 칭찬을 받아서 좋았고, 칭찬 속에서 만난 만남이 있어서 좋았다.


선배가 멋진 건 눈치가 있어서일까. 선배는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떠나면 한마디를 던졌다.

“같이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나는 가야 할 것 같다. 둘이 일할 기회가 많을 테니 서로 인사하고 얘기를 좀 하다 가라. 팀워크를 다지는 거지 이건 소개팅이 아니다. 나는 간다..”

얼굴 가득 웃으며 머리 뒤로 흔드는 손의 의미는 말과는 좀 달라 보였다.

“다음에 봬요. 안녕히 가세요”

둘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선배가 떠나자 갑자기 지원이 바짝 현빈에게 다가가서 한마디 했다. “아까 봤어요”

현빈도 한마디 했다. “저도 봤어요”

그녀는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보여 주었다.

현빈이 벤치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

현빈은 그때 그녀를 노트에 적고 있었다.

현빈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어 글 하나를 보여주었다.


꽃을 보는 눈에

봄이 보인다.

겨울을 머금었어도

봄은 누군가의 가슴에 와 있다.

꽃과 눈 맞추는 그녀의 봄은

눈을 지나서 가슴으로 가고 있다.


나는 그녀를 글로 적었고 그녀는 나를 사진으로 찍었다.

현빈은 멋쩍은 웃음 안에 표정을 숨겼고 그녀는 마음껏 미소를 봄 안에 뿌렸다.

“자리에 앉아 있기에는 날이 너무 좋지 않아요?”

봄은 밖에 있었고 우리는 봄으로 나왔다. 밖에 기다리는 봄을 우리는 가슴으로 안았다.


처음 만난 날 치고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 처음 만난 날에 너무 말이 많은 거 아니에요?"

"말은 지원 씨가 많이 했고 나는 많이 들었을 뿐인데요."

"그럼 현빈 씨는 좋지 않았어요?"

뽀로퉁하게 물었다.

"좋았으니 많이 들었겠지요."

그러면서 현빈은 생각했다.

오래 만날 것 같다.

지원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다시 수많은 말이 이어졌고 두 사람이 걸어온 걸음걸음마다에 수줍은 미소와 작은 설렘이 떨어져 있었다.

모두의 길이지만 둘만의 길이 될 때가 있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둘은 서로만 보였다. 그리고 걸음마다 서로의 마음에 도장을 찍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보이는 이 그리움의 발자국은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서 아무리 멀리 있어도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일 것이다. 그리움의 발자국은 너무나 가슴에 깊게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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