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여행 비에이 마을에서
2023년의 두 번째 토요일 아침. 나는 커피를 내려서 노트북을 투닥거리고 있다. 커피잔은 2018년 교토 여행에서 마음에 쏙 들었던 '이노다 커피'라는 카페에서 사 온 것이고 원두는 2주 전 삿포로 여행에서 홋카이도 지역에만 있다는 '롯카테이'라는 과자점에서 집어온 것이다. 여행의 흔적을 조그맣게라도 남겨두는 것은 조금은 쓸쓸하지만 두고두고 흡족한 일이다. 이 커피잔을 쓸 때마다 엄마랑 처음으로 떠난 해외여행, 호젓한 도시에서 최고의 토스트와 커피를 먹으며 맞이한 아침이 무척이나 기뻤던 마음이 떠오른다. 원두를 커피 머신에 부으면서는, 12월 31일이라 북적거리던 삿포로 어느 백화점의 풍경과 '지금은 너무 복잡하고 정신이 없지만 나중에 커피나 마시면서 이 복잡함을 떠올려야지'라는 내심으로 장바구니에 커피를 집었던 기억이 난다. 말하자면 물건에 기억을 나누어 담는 것이랄까.
기억을 공유할 상대가 사람이라면 가장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이 꼭 오래도록 옆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 또 기억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이 100% 일치하지는 않으니, 내 몫의 감정과 기억을 담아둘 사물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남이 보면 감성적이네, 라고 할 만한 어떤 생각을 한 뒤에는 '쓸데 없는 생각을 했네.'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이런 쓸데 없는 생각, 하지만 실은 쓸데없다고 생각하진 않는 생각들을 하면서 토요일 아침을 보냈다. 끝으로는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여전히 모두 과거에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가 과거지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 좀 쓸쓸해진다. 늘 미련을 떠는 것 같기도 하고 현재에서는 늘 부적응하는 것 같기도 하고. 늘 놓치기만 할 뿐 현재는 살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실체 없는 생각들을 하는 것이 괴롭기도 하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과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어떤 날은 영 기억 속에 숨어들고 싶을 때가 있고, 최근에는 그런 일이 전보다는 드물어서 이 무용한 시간들이 즐겁고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잔소리가 길었는데 아무튼. 어차피 나는 기억을 파먹고 사는 사람. 커피를 마시다가 일본을 오며가며 남아 있는 잔상을 적어 두려고 맥북을 열었다.
처음 일본을 간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일본 자매학교가 있는 규슈 쪽 어느 도시로 홈스테이를 하러 갔다. 하루는 학교에서 맺어준 학생 집에서 묵고 하루는 온천이 딸린 호텔에서 묵는 짧고 알찬 2박3일 일정이었다. 그 당시 나는 우리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던 친구네 집으로는 배정을 받지 않았고 새로운 친구와 짝 지어져서 왠지 불만스러운 마음이었다. 그때 느끼기로는 학교에서 꽤 먼 짝지의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오래 탔고, 지하철에 내려 마트에 들려 칼피스인지 우유 같은 것을 샀고, 영화에 나올 법한 일본 가정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집에서 한상 가득 차려준, 직접 손으로 회며 뭐며를 속재료로 넣어서 싸 먹는 '테마끼', 남는 시간 동안 나와 같이 간 옆반 애 한 명, 내 짝지와 그 친구 넷이 방에 앉아 만들었던 실 팔찌, 실 팔찌를 차고 뒷마당에 나가 불꽃놀이를 하던 장면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왠지 그 집까지 가던 길과 짝지의 벌건 볼이 떠오른다. 그 뒤로 몇 번 일본 여행을 하면서 보게 됐던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풍경들과는 달리, 길고 지루하고 시시하기만 하던 지하철 밖의 풍경들. 그 아무것도 없던 벌판을 지하철로 달려가던 길 줄곧 옆에 앉아 있던 짝지. 남이나 다름 없던 일본 여자애. 큼직한 얼굴과 큰 눈, 사람 좋은 미소, 불규칙하게 발갛게 달아오른 볼, 말도 안 통하는 또래를 이끌고 가던 땀에 젖은 뒷모습이 실은 내게 꽤나 든든했다는 것이 나는 아주아주 가끔 생각난다. 이유는 몰라도 그로서는 당연했을 그 일박이일의 짧은 호의를 떠올리면 나는 괜히 눈물이 난다. 고맙다고 말을 했던가.
2022년은 삼박사일 홋카이도 여행을 갔다. 여권이 어딨나 찾다가 2018년 교토에 갔을 때 썼던 수첩을 발견했다. 꽤나 희석되었었는데, 실은 나는 그때 처음으로 엄마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부풀어 있었다. 무거운 짐을 하나 더는 기분이었기도 하고 순수하게 꽤나 기뻤다. 아침 이른 비행기라 엄마가 전날 천안에서 올라와 같이 거실에서 이불을 깔고 잤고, 평소 여행계획을 잘 못짜서 재미 없으면 어떡하지 라며 일정을 점검하는 나에게 엄마가 '선아 나는 지금처럼 그냥 있기만 해도 재밌어.'라고 말해줬던 게 생각 난다. 교토에서 2박 3일, 오사카에 잠시 마실 다녀오는 흔한 일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랑 같이 새로운 좋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는 게 나는 지금도 기쁘다.
수첩에는 교토에서 오사카를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책으로 스도쿠 게임을 하던 아저씨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메모를 보니 기억이 났다. 여러 면에서 아날로그적인 일본이라서 그런가. 한 사람의 평범한 출퇴근길 모습인데도 나는 그냥 그 모습을 새겨두고 싶었다. 지금도 아는 사람이 몇 없고 언젠가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모습일 것 같아서 그랬다.
이번 홋카이도 여행에서는 관광버스 투어로 비에이 삿포로 지역에 다녀왔다. 이동하는 내내 홋카이도 전반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홋카이도는 원래 원주민이 살던 곳이라 일본에 편입된 지 140여 년 정도밖에 안되었다든가, 비에이와 후라노 모두 일본어가 아니고 원주민의 언어에서 따온 지명이라든가, 세이코마트가 이 지역 대표 마트라든가 하는 것들) 짧게는 10분 길게는 3~40분씩 달리다가 사진 찍기 좋은 명소들에 세워주면 눈 구경을 실컷 하고 사진도 실컷 찍는 식의 투어였다.
그중 비에이역이 있는 마을, 무슨 네덜란드 마을처럼 예쁜 건물로 정비를 해둔 귀여운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연말이라 대부분의 식당과 카페가 문을 닫았지만 가이드 분이 개중 문을 연 유명 식당에서 도시락을 미리 예약해주셔서 먹었다. 에비동이 유명한 준페이라는 식당이었다. 식당 내부엔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포함한 일부 인원은 마을 사람들을 위한 공용 공간으로 이동해서 도시락을 먹었다. 어린이방도 있고 서가도 있고 노인들을 위한 혈압 재는 기계도 있고 보드 게임도 잔뜩 갖춰져 있는 넓고 예쁜 곳이었다. 사방에는 통유리를 통해 눈 오는 풍경이 훤히 보여 더 운치 있었다.
내가 앉은 사이드에 동네 사람은 딱 한 명, 여느 일본 아주머니처럼 귀여운 옷차림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만화책을 잔뜩 쌓아두고 읽고 있었다. 고개만 들면 쏟아지는 눈이 보이는 자리에서, 몸에는 레이스 가디건 같은 것을 머리에는 핑크색 털뜨개 모자를 걸치고. 사실 핑크색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삿포로에서 한 시간 반은 넘게 달려야 나오는 마을, 제설차가 치워둔 눈이 내 키보다 훌쩍 큰 이 동네. 연말이라 식당이고 뭐고 문을 다 닫아버린 한적한 이 시간에 혼자 만화책을 보는 이 할머니의 시간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이야 진짜 좋겠다, 라는 생각과 좀 외롭지 않을까, 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나이 들어도 만화책은 재미가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들을 두서 없이 했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우리는 뚜껑을 덮어두어 눅눅해진 도시락을 다 먹고 공용 정수기에서 물도 한 컵씩 마시고는 곧 자리를 털고 나왔다. 다시 그쪽을 슬쩍 보니 할머니는 책에 볼을 파묻고 쪽잠을 자고 있었다. 할머니 너머엔 유리창, 유리창 너머 밖에서는 눈이 한바탕 내리고 있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렸고 나는 관광버스를 타고 투어를 하는 내내 아주 많고도 잡다한, 하나같이 쓸모는 없는 생각들을 집어들었다 눈 속에 던져버렸다 했다. 달콤하게 잠든 할머니의 모습은 몇 번쯤 다시 생각났다.
어느 여자애의 붉은 볼처럼, 스도쿠 책을 응시하느라 잔뜩 구겨진 미간처럼 낯선 사람의 모습이 또 하나 풍경처럼 남았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왠지 오늘 동그르르 맴도는 그 모습들을 나는 알사탕처럼 잘 굴려서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