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배급 방법
2014년에 쓴 글입니다만 여전 한국에선 보기 힘들군요.
흔히 인터넷은 불법 복제의 온상이자 통로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냅스터, 소리바다, 웹하드, 토런트 같은 기술들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힘을 빌어 영화나 음악 같은 각종 창작물들이 법적 규제를 피해 전세계 곳곳으로 순식간에 전파되기 때문이다. 물리적 매체를 판매함으로 수익을 얻던 산업기반은 시나브로 붕괴되었고, 상대적으로 뒤늦게 도입된 디지털 배포는 기술적 한계와 이용자들의 문화지체 현상으로 인해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고 있는 수준이다. 자연스레 컨텐츠 산업 붕괴의 모든 책임은 불법 복제-전파가 가능하게 만든 기술들에게 돌려졌고 현재 그 선두에 있는 토런트 서비스는 악의 축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비트토런트(BitTorrent)사는 2013년에 흥미로운 발표를 한다(주1).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비공식 경로로 각종 문화컨텐츠를 공유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파일 공유 기술인 토런트(Torrent) 기술을 디지털 컨텐츠 배급에 정식으로 도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서 2013년 4월 26일에 개봉하는 [아서 뉴먼]이란 영화의 초반 7분 영상을 개봉 전에 토런트 시드 파일 형태로 배포한 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게 했는데, 단순한 예고편 이상의 것을 제공함으로써 예비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오려는 적극적 시도의 일환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배급사가 거대 배급사가 아닌 독립영화 스튜디오인 씨네다임(Cinedigm)이란 사실이다. 이번 시도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스크린 융단폭격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고 그저 소수의 사람들에게 보이기만 해도 감지덕지인 소규모 배급사나 독립영화인들에게 그동안 박탈당했던 ‘관객과 만날 기회’를 제공해줄 대안적 배급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토런트 기술을 이용한 배급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토런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일반적으로 파일을 내려받을 때는 하나의 컴퓨터(server)에 올려져 있는 파일을 내려받게 된다. 동시에 여러 명이 접속하면 내려받는 속도는 접속자 수만큼 줄어든다. 한정되어 있는 자원과 통로를 나눠쓰다보니 속도가 느려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또 요즘에는 인터넷 속도가 빨라져서 DVD 한 장 용량의 파일도 몇 분만에 받을 수 있다지만 그조차 서버를 운영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환장할 노릇이다. 동시 접속자수를 늘리고 다운로드 속도가 빨라지게 하려면 그만큼 파일을 저장하고 있는 서버의 수를 늘려야 하는데 그게 다 비용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찌기 그리드 컴퓨팅(Grid-computing)이란 기술이 개발되었다.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한 세탁업자에게 누군가 1000벌의 빨래감을 급하게 부탁했다. 세탁소에 있는 세탁기만 돌려서는 10시간은 족히 걸릴 분량의 양이다. 그런데 세탁소 주인의 똘똘한 자식이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 아파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세탁기를 빌려 쓰면 안되나요? 대부분의 집에 있는 세탁기는 하루 중 한 시간 이내로만 사용되니 그 유휴 자원을 활용하면 자신들의 능력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무릎을 탁 친 세탁업자는 빨래를 잔뜩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일정 수수료를 주고 빨래를 부탁한다. 어차피 남는 자원으로 푼돈이라도 벌자는 주민들의 협조로 세탁업자는 엄청난 일감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고 이후에도 부담스러운 일감이 맡겨질 때마다 놀고 있는 세탁기를 이용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치자. 여기서 세탁기는 컴퓨터로, 빨래감은 전송해야 할 파일로 대치하면 그리드 컴퓨팅의 개념은 전부 설명된다. 즉 누군가 파일 다운로드를 요청했을 때 서버에 저장된 파일만을 제공하면 병목현상이 생겨서 느려지니 현재 파일을 받고 있거나 이미 다 받은 뒤에 저장해놓은 개인들의 컴퓨터에서 조금씩 나눠서 받게 하면 서버의 부담이 줄어들게 되는데 이게 바로 토런트 전송 방식의 핵심이다. 이런 종류의 십시일반 전송 기술은 이미 곳곳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무료 동영상 플레이어를 다운받아서 사용하고 있거나 웹하드 업체의 무료쿠폰에 혹해서 그 사이트를 통해 영화나 음악을 내려받았던 적이 있는 컴퓨터라면 이미 그리드 컴퓨팅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주2)
토런트를 이용한 배급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 우선 서버 운영비가 없는 개인이나 독립창작자조차 쉽게 불특정 다수에게 파일을 배급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 아마추어 뮤지션이 자기가 만든 곡의 MP3 파일을 인터넷에 연결된 자기 컴퓨터에 넣어놓고 그 정보가 담긴 아주 작은 용량의 씨앗(seed) 파일을 인터넷 곳곳에 전파한다고 치자. 배급을 하려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까. 할 필요가 없다. 시드를 공유하는 것이 곧 배급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씨앗 파일을 열어서 다운로드를 시작하는 순간, 그 컴퓨터는 뮤지션의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내려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다른 누군가에게 보내주는 서버의 역할까지 하게 된다. 처음 파일을 올린 뮤지션이 자신의 컴퓨터를 끄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 파일을 내려받은 채로 지우지 않고 갖고 있다면 제3의 이용자는 그 컴퓨터를 통해서 계속 내려받을 수 있다. 만약 시드 유지가 잘 되지 않을 경우(다운 받은 뒤에 컴퓨터를 끄거나 저장된 파일의 위치를 옮길 경우)에는 느려질 수도 있겠지만, 전세계에 단 한 대의 컴퓨터만 켜 있더라도 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성공적으로 배급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그 다음 장점으로는 배급하는 내용물의 유형에는 한계가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동안 영화는 동영상파일로, 음악은 음악파일로만 내려받고 공유해왔다. 그런데 영화나 음악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부가자료가 있다면 어떻게 보내주어야 할까. DVD나 CD라면 부클릿(속지)의 형태로 제공하거나 부록 형태의 기념품을 첨부하면 되었지만 파일 형태의 배급방식에선 용량의 한계나 판매 업자의 배려 부족으로 핵심 알맹이를 제외한 내용을 제공받을 순 없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용량과 속도에서 자유로운 토런트 번들 방식을 통한다면 부록들도 원하는 만큼 집어넣어 배송할 수 있다. 이것저것 다 긁어 모은 뒤 하나의 압축파일로 묶은 다음에 씨앗 파일만 공유하면 되지 않는가.
여기서 잠깐. 토런트 배급이 불필요한 유통과정을 생략한 채 빠르고 널리 배급하는 데 장점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실질적인 수익을 창출하긴 어렵지 않을까? 어차피 공짜로 내려받고 있는 해적판 음반과 영화와 다를 게 없는데 돈은 어떻게 벌라는 건가.
비트토런트사의 토런트 번들 페이지를 방문해보면 적지 않은 수의 프로젝트가 토런트를 통해 배급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The Act of Killing] 같은 유명작부터 이름 모를 음악가의 음반까지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컨텐츠가 배급되고 있다. 이 중 맨 위에 있는 영화 [Cheap Thrills]의 ‘번들 보기’를 클릭해보면 토런트를 통해 내려받을 수 있는 파일의 목록을 볼 수 있다. 1080p 해상도의 예고편이나 영화의 일부 장면 동영상 뿐만 아니라 포스터나 영화 스틸 사진이 들어 있고 사운드트랙에 쓰인 음악과 보도자료집 형태의 PDF 문서파일도 함께 받을 수 있다. 그동안 정식으로 제공되는 유료 컨텐츠 업체들이 달랑 음악과 영화 본편 파일만 제공해준 것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선물들이다. 여기까진 무료로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다.
왼쪽 아래에 있는 ‘지금 보기’를 누르면 영화를 볼 수 있는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신기하게도 ‘On demand(다운로드)’, ‘Digital VOD(스트리밍)’, ‘Theater(극장)’의 세 가지 형태로 볼 수 있다는 안내가 나온다. ‘영화표 구매’를 선택하면 미국 전역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의 목록과 예매 안내 페이지가 나오고, ‘지금 보기’를 누르면 아이튠즈 스토어 같은 다운로드 방식의 배급사나 컴캐스트 같은 스트리밍 방식의 배급사로 연결된다. 즉 홍보물이자 미끼상품으로서 다양한 형태의 컨텐츠를 먼저 무료로 제공한 뒤 만족한 사람들이 차후에 유료로 관람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관문(혹은 원스탑 서비스)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제작비를 조달해야 할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 웹페이지나 번들 파일 속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즐겨찾기 파일만 올려 놓으면 된다. 토런트 번들의 컨텐츠를 접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해당 상품을 구매하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이런 내용물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꽤 높은 비율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건은 분명하다.(주3)
굳이 토런트 번들은 비트토런트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시도해볼 수 있다. 토런트 프로그램을 깔고 배포하고 싶은 파일을 프로그램에 등록한 뒤 시드 파일을 생성한다. 그리고는 지인들에게나 각종 게시판에 시드 파일을 첨부해서 전송하면 끝난다. 동영상, 음악, 그림, 문서 등 파일 유형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공유하고 배포할 수 있다. 아직까지 한국에선 결제수단까지 동원한 배급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광범위한 배포가 목적이라면 이보다 쉽고 저렴한 배급수단은 없을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물어 보자. 토런트는 독립창작자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이튠즈 스토어나 넷플릭스처럼 신기술만 접목시켰지 뼈대는 전통적인 판매방식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거대 공룡들 사이에서 소수의 취향과 목소리를 담은 창작물을 유의미하게 유통시킬 수 있을까?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3G에서 4G LTE로 갈아타라고 열심히 떠들어대는 이동통신사의 공허한 광고처럼 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아직까지 언론에 나온 몇몇 사례를 제외하곤 토런트 번들이 이뤄낸 뚜렷한 성과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누구나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배급할 수 있다는 점, 내 작품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동료 배급자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최종 결과물만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선물과 부록들을 한꺼번에 배포할 수 있다는 점은 규모의 승부에 지쳐서 지레 포기하곤 했던 창작자들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크라우드 펀딩이 독립제작자들에게 작은 숨구멍을 터준 것처럼 토런트 번들도 머지 않아 그런 역할을 하리라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 팁1 -
이미 토런트를 사용하고 있거나 앞으로 사용할 독자들을 위해 노파심에서 전하는 주의사항 하나. 토런트로 파일을 받을 때는 운영체제가 설치된 디스크가 아닌 별도의 디스크나 파티션에 저장을 하는 것이 좋다. 가령 C: 에 윈도우가 깔려 있다면 C: 가 아닌 D: 나 이동식 디스크 같은 곳을 저장 경로로 설정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토런트는 하나의 작은 파일이라도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십 개의 파일들에서 조금씩 뜯어 오는 방식으로 전송하는데, 디스크의 작동 원리 상 저장될 때엔 일렬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빈 공간에 틈나는 대로 기록되기 때문에 저장할 때나 불러올 때 디스크에 무리를 준다. 게다가 운영체제와 응용프로그램까지 동시에 돌리는 상황에서 토런트까지 전송 중이라면 디스크는 제 수명의 반도 못 채운 채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부디 토런트 다운로드는 별도의 디스크에...
- 팁2 -
앞서 언급한 그리드 딜리버리에 원치 않게 공헌하면서 나도 모르게 느려진 컴퓨터에 짜증을 내셨던 분들은 ‘그리드 딜리버리 제거’란 검색어로 검색해보시길. 그리드 관련 프로그램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잘 나와 있으니까.
주1) http://www.wired.com/underwire/2013/05/bittorrent-bundle , http://www.bloter.net/archives/150674
주2) 미항공우주국(NASA)의 SETI@HOME 프로젝트에 이 기술이 적용되고 있는데, 외계인을 찾기 위한 우주 신호 분석 작업에 동의한 전세계 이용자들의 컴퓨터가 ‘쉬고 있을 때’ 조용히 계산에 동원되고 있다. 같은 원리의 기술이 적용되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곰플레이어, 다음팟 플레이어를 설치하거나 웹하드 다운로드 프로그램을 설치한 컴퓨터에서도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가 보고 있는 영상의 일부 조각을 파일 서비스 제공자를 대신해서 보내주고 있다. 약관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리드 딜리버리 같은 낱말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그게 바로 그리드 컴퓨팅이다.
주3) 다음 기사에 따르면 유명 음악가인 Moby의 최근 앨범인 ‘Innocents’는 토런트 번들로 배포되었는데 890만 번의 다운로드가 이뤄졌으며, 419,000명의 이메일이 모비의 이메일 대기명단에 올랐으며, 그 중 13만명이 아이튠즈 스토어의 앨범 판매 페이지로 이동했다고 한다.(그중 몇 명이 실구매로 이어졌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http://www.cnet.com/news/bittorrent-bundle-delivers-joy-ready-for-spot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