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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일 Jan 31. 2017

이와이 슌지 감독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그들은 우리 안의 엔타운을 들여다 보라 한다

옛날 옛날에 엔(YEN)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했을 때, 도시는 이민온 사람들로 넘쳐흘러 마치 그 옛날에 있었던 골드 러시와 같았다. 엔을 목적으로 엔을 파내려고 모여드는 도시. 그 도시를 이민 온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엔타운.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그 이름을 싫어해서 자기들의 도시를 그렇게 부르는 이민자들을 거꾸로 엔타운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좀 애매하지만 엔타운이란 그 도시와 그곳에 사는 이방인들을 말한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나레이션 중


  인체구조상 고개를 완전히 뒤로 돌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인간은 자신의 ‘뒤’를 잘 돌아다보지 못한다. 누구나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 학교에서 배우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반복해서 저지르는 수많은 오류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더욱이 단순히 돌아보는 수준이 아니라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것은 어지간한 의지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경지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고통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 고통들을 이겨내고 겸허한 자세를 갖는 것. 그것을 우리는 성숙이라 부른다.


  이 영화는 결국 자신에 대한, 일본인 자신에 대한 영화다. 2차대전에서 패전한 뒤 재기의 구슬땀을 흘리며 세계 곳곳에 흩어져 달러를 벌어들인, 어쩌면 월남전과 중동특수를 한껏 이용해서 훌쩍 자란 우리와도 닮아있는 독하디 독한 일본인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듯, 혹은 오래된 사진첩을 펼쳐보듯, 영화 상영 시간 내내 중국유민과 그 외의 이방인의 모습을 통해서 일본인들의 모습을 반추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흘러들어온 이방인들을 돈만 좇는 쓰레기라며 엔타운이라 부른다. 한때 ‘경제동물’이란 이름으로 비하되던 자신들의 모습이 엔타운들의 모습과 겹쳐지면 겹쳐질수록 마치 악몽을 떨치려는 듯 더욱 더 모질게 대한다.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천박한’ 일자리와 ‘밑바닥’ 생활, 또는 추방뿐이다. 일본인과 엔타운들의 공존이란 그저 창녀 그리코나 신체를 담보로 맡긴 명목뿐인 엔타운 클럽의 일본인 사장처럼 기형적인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엔타운끼리는 잘만 어울려 살아간다. 중국어, 일본어, 영어. 비록 통역이 필요하긴 해도 그들은 별 문제없이 소통한다. 중국인 그리코가 일본어를 하고, 전형적인 일본식 발음으로 ‘My way’를 부른다. 그리고 그리코를 찬양하기 위해 한 백인은 칸초네를 부른다. 이 모든 것이 이질감 없이 한 데 섞이고 있다. 공존은 알고 보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고물상의 그들처럼, 홍등가의 그들처럼.

  그렇다면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일본은 성숙해진 것일까. 그들의 행태를 보면 변화의 조짐은 보일지언정 절대로 성숙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치인들의 끝없는 망언과 평화헌법개정 시도, 특히 독도를 비롯한 영토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극우적 행태를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미성숙한 일본을 탓하기엔 우리 역시 너무도 부끄럽다. 외국인노동자들이 한국에 오기 전에 배우는 우리말이 “때리지 마세요”와 “우리도 사람이에요”라니. 공존보다는 배제, 포용보다는 구별이 더 익숙한 사회. 그것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나비. 근래 동서양 모든 영화들이 나비를 다룬다.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모호한 세상을 적절히 비유해주는 장자의 호접지몽에 매료된 탓일까. 그런데 모두 호접지몽의 줄거리인 ‘나비와 나의 혼동’이란 말장난에만 빠질 뿐, 이야기 이면의 본뜻은 간과하고 있다. 장자의 비유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데 쓰인 것이라기보다는 ‘자타의 구별을 잊는’ 경지까지 나아가라고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다. 즉 인위적으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행위는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서로 함께 잘 살 수 있는 공존과 상생의 철학을 행하자는 것이 그 핵심이라 하겠다. 그것이 곧 장자의 ‘물아일체’ 사상이자 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숙의 의미가 아닐까. 마치 아게하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과학이론 중에 나비효과란 것이 있다. 북경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바다 건너 뉴욕에선 태풍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의 미성숙한 모습이 언제 어디서 우리에게 커다란 보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것을 잠시나마 생각하게 해준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썩 좋은 영화다. 비록 뭐라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산만한 구조와 혼합 장르의 형태를 띠어 본모습을 숨기고 있긴 하지만, 분명 일본인에게만 교훈을 주는 영화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우리 안의 엔타운을 들여다 보라 한다.



p.s. 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 중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러브레터>나 <하나와 엘리스> 같은 화이트 이와이만 아는 사람들에게 다크 이와이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인 이 영화를 소개하지만 늘 그렇듯 반응은 시큰둥. 아쉬워서 이 글을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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