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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일 Mar 27. 2018

학습소설 0화 - 숫자의 반란

학습소설 연재를 시작하며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란 곳에 몇 년 전부터 글을 써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사나 칼럼을 쓰다가 요즘엔 뉴미디어와 첨단 기술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목적의 'ACT!학습소설'이란 꼭지를 맡아서 두 달 간격으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전달해야 하는 주제와 내용이 정해져 있고 글솜씨도 부족하여 소설이라기엔 미흡한 부분이 있지만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을 최대한 쉽게 풀어내고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쓰려고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몇 년간 썼던 학습소설을 브런치에 옮겨 보려 합니다. 많은 IT 제품들이 그렇듯 시의성을 놓친 게 꽤 되기에 걱정도 됩니다만 담고 있는 주제는 여전히 유효할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뻔뻔하게 올리겠습니다.
  0화로 몸풀기 삼아 우화 하나를 올립니다. 굳이 부연 설명을 하자면, 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싫어합니다. 피하는 느낌이 들어서죠. 극복하려면 직면하고 직시해야 하는데 '불과'라고 표현하면 애써 무시하는 것 같거든요. 차라리 중요성을 인정하고 맞서 싸우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 썼던 소설인데 지금 생각하면 0과 1이란 숫자(디지털)의 중요성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숫자의 반란


몇 번 버스를 타시겠어요?

어느 날 세상 모든 숫자가 사라졌다.


처음엔 인쇄된 숫자가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난 사람들은 시간을 몰라 허둥댄다.

버스와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엇을 타야 할지 몰라 걸어가기로 한다.

운전자들은 속도에 대한 감을 잃어 툭하면 과속을 저지른다.

하지만 단속 경찰도 스피드건을 읽지 못하니 그냥 놓아줄 수밖에. 

그 덕분에 교통사고가 폭증한다.


상점들은 아예 문을 닫았다.

가격도 읽을 수 없고 재고 파악도 안 되는데 어떻게 영업을 하란 말인가.

여차저차 일터에 간 직장인들은 정전을 만난 듯 평온한 시간을 보낸다.

전화번호를 모르니 통화를 할 수 없고 숫자가 없으니 엑셀을 다룰 수 없고 문서에서 숫자가 안 보이니 일을 할 수가 없다. 

쪽번호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회의는 할 수 있을까.


밥 한 끼를 먹을 때도 숫자가 있어야 돼?

학교도 난리다.

매번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학생을 부르느라 수업시간이 모자라고 책 쪽수를 몰라 교사와 학생들이 제각기 딴 곳을 펴 들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 교실에 두 명의 교사가 들어와 있기도 하다.

몇 교시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이 와중에도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시험이 사라졌으니.

주관식 시험을 보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뭐하나. 

점수를 매길 수 없는데.


식당과 주방에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재료를 계량화할 수 없으니 오로지 눈대중으로 요리를 한다.

너무 짜고 너무 맵고 가끔은 먹을 수 없는 음식까지 식탁 위에 올라온다.

그 덕에 평생 손맛으로만 요리하던 식당의 문턱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밥값 지불 문제가 발생한 이후 영업은 끝나고 말았다.


돈의 가치는?

가장 심각한 곳은 금융권.

모두들 지구 종말을 앞둔 사람들처럼 멘붕에 빠져 있다.

모든 종이 위에 금액이 사라지니 글자와 초상화 인물로 액수를 판별해 보지만 이윽고 포기하고 만다.

몇 장인지 일일이 세어 기억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쓰기만 하면 지워지는 숫자 앞에선 모든 금융 거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체나 주식 거래 같은 전산망을 이용한 업무는 말할 필요도 없고. 

결국 모든 곳에서 손가락 발가락까지 동원해서 물건을 세고 교환하는 풍토가 확산된다.

당근 하나 둘 셋넷다섯 개 주세요.

여기 퇴계 이황 그려진 천 원짜리 하나 둘 세 장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숫자 개념조차 사라지고 만다.

무엇이 많고 적은 지조차 비교할 수 없게 되니 모든 거래가 중단된다.

교통수단을 믿지 못하게 된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찬다.

전화를 걸 수 없으니 직접 두 발로 걸어서 말을 전하러 가야 한다.

단축다이얼을 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다.

숫자가 없는데 컴퓨터와 전화교환기는 작동하고 있을 것 같은가. 


숫자가 없으면 발이 바빠진다

해 뜨자마자 일어나 걷던 한 사람은 정오 무렵 친구에게 찾아가 밥 한 끼를 함께 하며 단순한 안부를 묻는다.

친구가 몇 동 몇 호에 사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사람은 술 취한 사람들의 본능을 떠올려보시라.

안부를 물은 후 다시 한참을 걸어 해질 무렵에 집에 도착한다.

자연스레 이동 범위가 줄어들게 되어 소수의 가까운 사람들과 친밀해진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치르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런데 결혼식장 풍경이 재미있다.

축의금은 사라지고 저마다 집에 있는 소중한 물건들을 선물로 들고 온다.

예전에 상대방의 잔치에서 얼마 냈는지 따져볼 수조차 없으니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냥 받을 수밖에.


스포츠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야구나 농구 같은 점수를 내야 하는 종목들의 인기는 시들고 씨름이나 쇼트트랙처럼 승부가 명쾌한 종목만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러나.

수당이 안 나오니 경기를 하는 보람이 없고 경기장을 열어 봐야 입장료를 걷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애초부터 말이 안 되긴 하다.

숫자에 대한 개념이 없는데 누가 이기고 지는지 어떻게 따질 수 있겠나.

혹시 유전자에 깊게 새겨진 경쟁에 대한 본능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건강을 위한 운동 말고 대부분의 스포츠는 자취를 감춘다.


참. 잊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병원에서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다.

맥박과 혈압도 재지 못하고 주사를 놓지도 못한다.

가끔 감으로 투약하고 수술하는 간 큰 의사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환자가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음식이야 조금 맛이 없어도 먹고 죽지는 않지만 약의 양이나 마취제 분량 조절을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숫자가 사라져 목숨까지 사라진 모든 이들에게 애도를. 


진작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표성을 얻지 못했다.

선거를 해봐야 누가 다득표자인지 누가 다수당인지 알 수 없는 건 물론이고 기호 일 번인지 이 번인지 구별도 안 가니 정치할 맛이 나지도 않는다.

물론 오래전부터 월급이 지급되지 않았기에 이미 입법 사법 행정부 공무원들은 자발적인 휴가에 들어간 상태다.

자연스럽게 정치인들은 정책 그 자체로 평가를 받게 되어 다행이긴 하지만 숫자가 없으니 비교를 못하고 비교를 못하니 무엇이 더 나은 건지가 애매해졌다.

결국 진정으로 돈과 권력에 무심했던 소수의 정치인들만 시민들의 곁에서 사소한 봉사들을 하며 지낸다.

거리 청소. 장애인 보조. 간병.  도배. 급식.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들은 숫자 없이 사는 건 지옥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깨닫고 만다.

사는 게 뭐 별 건가.

그냥 이렇게 살뿐이지. 

죽지 못해 살고 악하지 못해 선할 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숫자 없는 삶에 길들여질 무렵 갑자기 숫자들이 돌아왔다.

아라비아 숫자. 한자 숫자. 한글 숫자.

모든 숫자들이 생각과 말과 글에 돌아왔다.

다시 셀 수 있고 다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원시인처럼 하루하루 연명하던 인류는 순식간에 원래 생활 습관을 되찾고 문명을 되찾았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세상은 숫자가 지배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영감을 받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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