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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일 Mar 27. 2019

<우상> 감상문

자유 연상 기법으로 써보는 영화 <우상> 소감(스포일러 포함)

0. 브런치 무비 패스

  브런치 무비 패스를 받게 되어 한동안 영화 시사회를 열심히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한공주>를 매우 감명 깊게 봤던 터라 이수진 감독의 차기작인 <우상>을 볼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다 본 후 첫 느낌은, 하필 첫 영화가 <우상>이라니, 내가 이걸 왜 신청했던가, 그냥 내 돈 주고 가볍게 보고 지나갔으면 좋았을 것을. 일주일 안에 감상문을 써야 한다는데 뭘 쓰지? 영화가 ‘우상’을 다루니 베이컨의 우상 비유를 접목해서 써볼까? 아니면 <비밀은 없다>, <황해>, <곡성>, <하우스 오브 카드>를 넘나드는 종횡무진 비평... 이건 너무나 힘들겠다. 참고할 자료를 찾아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그냥 편히 가자. 이렇게 대충 쓰려는 사람은 없겠지. 결국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기로 했다. 아마 영화를 본 관객들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이 글이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1. 추적 & 탐정

  경찰이 단서를 찾아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영화는 많지만 사법적 정의든 사적 정의든 경찰은 그걸 구현할 수 있는 권한과 당위성을 갖고 있다 보니 긴장과 갈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반면 평범한 사람이 사건을 추적하면 좀 답답하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라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딱 좋고, 조력자가 없으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탐정 수준의 주인공이 나올 때 가장 재미를 느낀다. 사건 해결을 위한 적절한 능력과 경력이 있지만 신분이 일반인이다 보니 운신의 폭이 좁고, 의도가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니까.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서 인물 변화의 진폭이 커야 보는 맛이 있지.

  <우상>에는 경찰이 나오고, 평범한 아버지 유중식(설경구)이 나오고, 순수한 정치인인 줄 알았다가 일순간 프로 범죄자로 변신하는 구명회(한석규)가 나온다. 셋의 추적 모두 별로였다. 경찰은 늘 그렇듯 나태했고, 유중식은 의욕만 앞세워 예리함이 없었고, 구명회의 추적 동기는 머리로는 납득이 되어도 가슴으로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스릴러로서 실패했다면 그건 긴박감이 부족하고 사건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추적자들의 변화가 주는 쾌감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예측 가능한 인물인 최련화(천우희)의 추적을 피하는 몸부림이 더 흥미로웠다. 액체가 된 고양이처럼 매 순간 가장 적당한 모습으로 변신하는 련화, 한국영화에 이런 캐릭터가 있었나?


2. CCTV

  언젠가부터 수사물에서 감시카메라는 빼놓을 수 없는 장치가 되었다. 아마 휴대폰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장치일 것이다.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지만 언젠가부터 영화에서 감시카메라 영상이나 몰래 녹음된 파일이 등장하면 기운이 빠진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사건만 생기면 영상을 줌인하거나 한 프레임씩 돌려보는 게 중요 수사기법으로 자리 잡는다면 모든 영화가 같아 보이지 않을까? <트루먼쇼>처럼 시내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프리즈 프레임>처럼 모든 사람의 몸에 카메라를 장착시킨 뒤 <다크 나이트>처럼 스크린 앞에 앉아 있다가 사건이 벌어지면 [CSI] 요원들처럼 영상을 분석해서 범인을 찾으면 되잖아. 이미 중국에선 그러고 있다는데 현실에 뒤쳐지는 영화라니...

  자동차 블랙박스나 골목길 방범카메라처럼 안전을 핑계로 곳곳에 설치되고 모두가 생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감시카메라를 더 무섭게 생각하는 내 가치관 때문에 좀 삐딱한 건 인정한다.

3. 폭력의 외주화

  <황해>의 면가(김윤석)를 연상시키는 최련화의 출신이 연변이 아니라 하얼빈이라 강조해도 비판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영화에서 고강도 폭력은 중국에서 온 인물들에 의해 자행된다. 이른바 폭력의 외주화다.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자 손에 피 묻히는 범죄는 ‘아랫것들’에게 떠넘기는 느낌이 든다. 리얼리티를 빙자하여 특정 집단을 타자화하여 깔아뭉개고 자기를 우월한 존재로 구별하는 이런 행태는 이제 그만하면 좋겠다. 모두가 평등하게 피를 묻히자! 


4. 핏빛 연못에 핀 연꽃

  하얼빈에서 온 사촌 자매 이름은 수련과 련화다. 모두 연못에 사는 연꽃을 연상시킨다. 비록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언젠간 고고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두 인물의 욕망이 강하게 드러난 이름이다. 구명회의 아들 요한처럼 작가의 의도가 과하게 드러나는 이름이다. 이 영화가 고작 이름 몇 개에 담긴 함의를 안다고 술술 해석되는 텍스트는 아니지만. 

  구명회는 예수도 아니면서 몇 번이나 물 위를 걷는다. 살기 위해 걸었던 그 물은 공교롭게도 누군가의 피가 흘러들어 붉게 변한 웅덩이였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이 죽어야 한다는 역설. 결국 화상을 입으면서도 부활한 구명회는 자신의 소망대로 대중의 우상(예수)이 되고 만다. 혹은 연꽃 속 부처?


5. 우상의 목 

  기억이 맞는진 모르겠지만 영화에선 다섯 번 목이 잘린다. 닭, 수련, 흥신소 직원, 마사지사, 이순신.

마지막 이순신 동상은 우상 타파 차원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다른 이들의 경우는 굳이 같은 부위여야 했을까 싶을 정도로 공통점이 없다. 포식자가 살기 위해서 피식자(닭)의 목을 쳐야 한다는 개념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조차 수련의 경우엔 적용되지 않으니 견강부회일 뿐. '제물'의 목을 잘라야 했다 하더라도 제물이 순수하지 않으면 의미는 없으니 그것도 패스... 강렬한 이미지 이상의 의미는 찾지 못하겠다.

목이 잘린 스탈린 동상. 이 경우엔 이유가 명확하잖아.


6. 부모다움

  우상에는 두 종류의 아버지가 나온다. 한쪽은 장애를 가진 자식이 안타까워 직접 성욕을 해결해주는 ‘자상한’ 아빠, 다른 한쪽은 나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식조차 장애물 취급하며 제거하고 싶어 하는 ‘매정한’ 아빠. 재밌는 건 영화에선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이 두 주인공에게 호감을 갖지 않도록 설정한 건 참 좋은 선택이다. 호감을 갖는 순간 우리 마음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되니까. <테이큰>을 떠올리면 바로 감 잡을 것이다.

  련화는 어떤가. 뱃속에 아기를 갖고 있지만 살기 위해 혹은 복수하기 위해 과감히 자식을 포기한다. 아이는 그저 국적을 얻기 위한 도구였을 뿐. 단 한 번도 다른 영화 속 희생자 여성들처럼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지 않는 련화는 그래서 소중하다. 전형적인 부모다움을 강요하지 않은 건 이 영화의 장점 중 하나다.


7. 하수구

  범행도구인 자동차는 폐차되고 범행 현장이던 주차장은 곧바로 공사장이 된다. 범죄 흔적을 없애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다. 이런 일을 여러 번 해본 사람처럼 구명회는 흠잡을 곳 없이 완전범죄를 완성해간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카메라는 주차장 바닥 공사 후 삐죽 튀어나와 있는 하수구 배관을 비춘다. 그리고 유중식의 시선 교차편집. '걸렸네, 하수구 안에서 곧 희생자의 피가 발견되겠군'이라고 관객들이 생각한 그때, 장면이 바뀌고 다시는 주차장이 나오지 않는다. 이건 그저 납득할 수 없는 여러 편집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설명이 친절하지 않은 건 괜찮다. 관객들도 가끔은 머리를 써야 건강에 좋으니까. 정보와 장치들이 끝나기 전에 제대로 쓰임새만 발휘한다면 얼마든지 관객을 희롱해도 좋다. 하지만 이 영화는 파종에 비해 추수가 성실하지 않다. 과잉이라 싶을 정도로 정보를 잔뜩 뿌려놓고는 성실히 거둘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치 144분짜리 영화를 90분에 욱여넣느라 그런 것처럼 자주 맥이 끊어진다. 맥거핀과 토끼발이 넘쳐나지만 초반부터 듣기 평가에 지친 관객들에겐 더 이상 알고 싶어 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 과연 누구의 탓일까.


8. 극장

  마지막 장면. 이전보다 거물이 되어 있을 게 분명한 구명회(한석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어도 객석에 앉아 있는 청중은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혹은 알아듣는 척한다). 화자의 권위와 아우라에 휩쓸려 분별없이 맹신하는 풍경은 흡사 베이컨이 말한 ‘극장의 우상’을 떠올리게 한다. 감독은 히틀러를 떠올리며 엔딩씬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굳이 멀리 독일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말과 이미지와 최의원(김명곤)이 말한 ‘드라마’로 사회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플루언서’들이 넘쳐나는 게 작금의 현실인데.

  반면 중앙에 앉아 있던 아이들은 이런 것엔 관심이 없다는 듯 딴청을 피운다. 타인이 아닌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어린아이들이 오히려 진실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우상의 목을 베고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이 아이들처럼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


9. 동굴

  이 영화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면서 '동굴의 우상'도 떠올랐다. 영화가 끝난 후 즉흥적인 느낌을 내뱉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지만,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영화를 여러 번 보거나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 검색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베이컨이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 대로 독단과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편의 작품은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손에서 떠날 때가 아니라 수용자가 감상할 때 작품이 완성되는 것처럼,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 됐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온전한 감상이 끝나는 것이라고 본다.

  부디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의 마음에 속히 평안이 찾아오길 바란다.


10. 끝

나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일까. 혹시 '시장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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