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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일상 여행의 기술

2018 Reunion, Paris, France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2015년, 신문 기사에 ‘서울시 공유 자전거 등장! 이름하여 따릉이’라는 헤드라인을 보고, ‘헉’과 ‘헙’ 사이의 정체모를 소리를 냈다. 놀람과 신남이 섞여있는 소리임이 분명했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공유 자전거가 당시엔 굉장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한국에 등장했다. 나도 모르게 괴상한 소리를 낸 것은 그간 동경해오던 해외의 공유 자전거가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이 자전거가 도시 안을 누비며, 막혀있던 도시의 혈관을 뚫고 조금 더 생기 있는 도시를 만들어 줄 것을 기대했다.


 공유 자전거를 알게 된 것은 스무 살, 첫 배낭여행을 준비하면서였다.

 누구나 입대 직전이라면 평소에 못해본 것들을 시도한다. 내 경우에는 홀로 유럽 여행 가는 것을 시도했고, 그동안 모은 돈을 털어 입대 일주일 전까지의 유럽여행을 계획했다.

 당시에는 SNS는커녕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그렇게 세대 차이나는 먼 과거가 아닙니다.)이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여행 정보라곤 두툼한 여행책뿐이었다. 

 지금은 유부남이 된 친구 T가 여행을 잘 다녀오라며 검정색 Large 사이즈의 등산가방에 여행책을 가득 넣어 선물해주었고, 그 책들 중 가장 유명한 붉은 책에서 공유 자전거를 만나게 되었다.


 파리를 소개하는 챕터였는데, 파리지엥이 에펠탑과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진 한 장이었다. 그 사진 속 자전거가 바로 파리의 공유 자전거, 벨리브Velib였다. 2007년부터 운영한 이 공유 자전거는 운이 좋게도 내가 여행하게 된 2010년에는 이미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 전 세계 도시들이 파리의 벨리브를 벤치마킹하는 중이었다.

 벨리브라는 이름은 프랑스어로 '자전거'를 뜻하는 '벨로Velo'와 '자유'를 뜻하는 '리베르테Liberte'의 합성어인데, T가 선물한 여러 권의 유럽 책마다 벨리브를 타고 자유로운 포즈로 미소 짓고 있는 파리지엥들이 항상 등장했다.

 

 단조롭지만 색채가 돋보이는 포인트로 멋을 부린 파리의 멋쟁이들이 무심한 듯 벨리브를 타고 달리는 사진 속에는 어딘지 모를 쿨함이 묻어있었다.

 책에 있는 설명을 읽어보니 정체모를 쿨함은 자전거 대여 시스템으로부터 나온 것 같았다. 대여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 자전거를 반납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목적지에 도착한 뒤 쿨하게 자전거를 내던져놓고(?) 가는 것이 이 공유 자전거의 주된 컨셉이었다.

 스무 살 쯤의 나는 벨리브를 타는 파리지엥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그 당시에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유행하지는 않았지만 이십 대 첫 버킷리스트를 '벨리브 타고 파리 여행하기'로 삼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생의 첫 배낭 여행지는 파리로 결정이 되었고, 부푼 기대감과 떨림을 갖고 비행기에 발을 올렸다. 연착, 지연이라는 단어를 늘 품고 사는 악명 높은 모스크바 공항을 거쳐 대략 20시간 만에 파리 샤르 드 골 공항에 도착했다.

 파리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벨리브를 타진 않았다. 일단 지리를 좀 파악해야 했고, 주변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서였다. 

 지도를 들고 숙소에서 걸어 나와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강을 따라 걷다 보면 63빌딩이 나오는데, 파리도 뭐 센강을 따라 걷다 보면 에펠탑이 나오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이어폰을 꼽고 거리로 나섰다. 


 그러고 보니 무작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유명한 웹사이트에서 소개된 '유럽여행 꿀팁'에 의하면, 적절한 여행 동선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 먼저 가고 싶은 여행지를 지도에 표시한다.
 - 다음으로 그 점들을 모두 잇는다.
 - 여기서 중요한 건 가까운 점을 이어, 길이가 가장 짧은 선을 만들어야 한다.

 이 방법을 따라 하다 보니, 다음과 같은 정답이 지도 위에 표시되었다.

'센 강을 따라 그냥 걸으시면 됩니다.'

(요즘 길 찾기의 아날로그 버전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부터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 지도에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들어간 오랑주리 미술관Musee de l'Orangerie을 거쳐 에펠탑까지. 여행자의 눈으로 구석구석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센 강에 노을빛이 녹아들어 파리는 조금 더 화려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벨리브를 타고 파리지엥들 틈에 섞여보려고 했으나, 처음으로 놀이동산에 간 어린아이처럼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으니 피로감이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하철을 타고 숙소에서 돌아와 대충 씻고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걷어 창밖을 보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테라스로 나갔다. 속옷 차림에 퉁퉁 부운 눈으로 테라스 너머 지붕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것을 구경했다. 파리에 봄바람에 트렁크 팬티의 끝이 나풀거렸고, 구름은 낮고 넓게 깔려서 마치 파리에서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파리에서 바다라니..." 

 파리와 바다,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재빨리 준비하곤 뭔가 대단한 혁명이라고 일으킬 것처럼 거칠게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숙소 앞에 벨리브가 있었다. 마치 "왜 이제야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하고 나직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첫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기 딱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가기로 한 방브 벼룩시장까지 벨리브를 타고 가기로 한다.


 벨리브를 타기 위해 아버지게 빌려온 신용카드를 가방 깊숙한 곳에서 꺼내, 정류장의 대여 화면을 톡하고 건드렸다.(당시 외국인이 벨리브를 타려면 신용카드가 있어야 했고, 학생이어서 신용카드가 없었다.)

 화면 속에는 'V E L I B' 다섯 알파벳이 마카롱을 닮은 파리의 색으로 자유분방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디자인조차 파리의 자유로움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 번의 터치 끝에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나의 벨리브가 기지개를 켰다

 나도 벨리브에 올라타서 바람을 잡으려는 듯 기지개를 펴고 목적지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아까 테라스에서 만난 봄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누군가가 머리를 말려주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벨리브에 탔다는 사실만으로 파리지엥들처럼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 또한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는 것 같았다.


 자전거 위에서의 자아도취 시간 끝에, 방브 벼룩시장에 도착해서, 빈티지 선글라스를 구매하곤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온갖 빈티지 아이템과 재미있는 소품들이 가득했고, 반가운 얼굴들ㅡ신승훈과 신해철의 LPㅡ도 만날 수 있었다.

 가볍게 쇼핑을 마치고 다시 벨리브에 올라타 그 날은 하루 종일, 벨리브를 타고 파리의 골목 구석구석을 누볐다. 잠시나마 이방인의 신분을 벗어나 그 도시에 녹아든 것 같은 느낌에 벨리브에서 내려오기가 싫었다.

2010 Shins, Paris

  하루 종일 함께 고생한 벨리브와 에펠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숙소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숙소 앞에 도착해 벨리브를 반납하려고 하니,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와 작별하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방금 사진을 찍었지만, 아쉬움과 첫 버킷리스트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으로 사진 한 장 더 남기기로 한다.

 그때 마침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인지, 흰머리에 바버자켓을 입은 할아버지가 장바구니를 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께 사진을 부탁하자, 너그러운 웃음과 함께 장바구니를 내려놓곤 사진을 찍어주셨다.

 비록 한밤중에 손떨림 방지 기능조차 없던 카메라여서 흔들리긴 했지만, 지금도 이 사진만 보면 십여 년 전의 행복감이 그대로 밀려와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곤 한다.

 벨리브와 함께한 시간은 드라마틱하게 짜릿하진 않았지만, 휴지를 타고 올라가는 물기처럼 천천히 행복감에 젖어들었던 순간이었다.


기념촬영 세 장_1)에펠탑과 함께 2,3)멋쟁이 할아버지의 작품 (2010)


 십 년이 지난 지금 내 곁에는 서울의 따릉이가 있다. 친숙한 이름만큼이나 쉽고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따릉이는 젊은 멋쟁이들만 타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새로운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나는 감히 따릉이 해비 유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주 이용하는 이유는 십 년 전 벨리브를 타던 여행자의 눈을 얻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버스나 지하철이 이동수단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따릉이를 타는 시간 동안은 파리에서 벨리브를 타던 순간과 이어져 서울을 여행할 수 있게 해 준다.


 내가 사는 도시가 삭막하게 느껴지거나, 일상의 신선한 바람이 필요할 때면 콧구멍에 상쾌한 공기를 가득 담을 수 있는 따릉이를 타곤 한다.

 그때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평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ㅡ이를테면 철물점 앞에서 광합성을 하는 눈이 투명한 길고양이, 노을이 질 때 지붕의 빛깔과 새들의 날갯짓 같은 것들ㅡ

 처음 여행하는 순수한 여행자의 눈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평소와는 또 다른 서울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저마다의 여행 속에서 잠시나마 행복을 느끼지만, 삶에서 우리의 일상은 여행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헬스를 하면 운동한 부위가 잠시 동안 펌핑되는 것처럼, 여행은 잠시 동안이지만 우리에게 큰 행복감을 맛보게 해 준다. 하지만 큰 행복은 아니더라도 행복한 감정을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다른 근육들보다 중요한 코어 근육처럼 말이다.


 따릉이를 타며 여행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방법처럼,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일상 여행법'이 존재할 것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오늘 저녁 콧구멍에 한가득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따릉이에 올라타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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