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36시간을*
마법 주문이라도 되듯, 정성스럽게 되뇌던 문장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누구나 한 번쯤은 앞니가 툭하고 빠지듯, 떨어트려 본 문장일 거라고 생각한다.
손을 다쳐서 운동하지 못할 때 스스로에게 말한 적도 있고,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나를 보며 친구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힘든 상황에서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말은 뻔한 말이라는 이유로 더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통해 위로를 받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은 떨어지는 사과처럼, 의식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는 것이 당연하다. 가만히만 있어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게 된다.
아마도 이 인고의 시간 동안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가만히 있으면 시간이 더 안 가니까.) 시간을 제물로 바친 우리들의 상황은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만 들으면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장소가 하나 있다. 이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 중에 ‘지나감’이라는 단어 말고는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장소인, 바로 공항이다.
보통의 공항이라고 하면 오히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커피 한잔의 여유랄 것도 없이 게이트로 간다거나, 때로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해 비행기를 놓치기까지 한다.
비행기 탑승 전, 면세점을 구경하는 경우에도 살 물건의 목록을 미리 정해놓지 않는다면, 사야 할 것들을 골라서 살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공항에서의 시간은 늘 이렇게 분주하다.
하지만, 공항에서 36시간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질 것이다.
공항의 시곗바늘이 녹슨 것도 아닌데,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긴 유럽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였다.
그때의 나는 미치도록 한국에 가고 싶었다. 한정된 주머니 사정에 먹을 것의 양보다는 질을 선택해서인지, 살은 10킬로그램 가까이 빠져있었고 여독은 또 오를 대로 올라 기숙사 벽면에 걸어둔 드라이플라워 같이 말라비틀어져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치료해줄 수 있는 치료제를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한국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삼겹살에 소주...)
하지만 유럽 대륙의 여신이 나를 너무 좋아했는지는 몰라도, 집에 가는 것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계획된 일정에 의하면, 마지막 여행지 모로코를 끝으로 한국에 가야 했다. 하지만 모로코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어떤 조건이나 필터를 추가해봐도 비쌌다. 굉장히 비쌌다.
내 전재산은 60만 원이었는데, 모로코 to 한국 티켓은 대략 160만 원이었다. 그동안 부모님 손 벌리지 않겠다고 고집부려가며, 힘들게 지냈는데 마지막 순간에 깨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바르셀로나로 가게 됐다.
뜬금없이 무슨 바르셀로나냐고? 전 세계 항공권 최저가 검색 사이트에서 신기한 티켓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BCN - ICN, 38만 원.'
오 마이 갓! 바르셀로나에서 인천까지 38만 원. 동남아 여행 가는 수준의 가격을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바르셀로나에서 4일간 체류해야 한다는 것과 경유지를 2개를 거친다는 단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일단 바르셀로나에서는 조식이 포함된 백패커를 위한 만 원짜리 호텔에서 장발장이라도 된 듯, 빵을 주머니에 주섬주섬 넣어 다니며, 하루에 2유로씩만 식비로 지출했다. (대부분이 마트에서 과일과 요플레같은 것들을 샀다.)
버스나 지하철도 타지 않았고ㅡ다행히 징그럽게도 계획된 정사각형 도시여서 길도 어렵지 않을뿐더러, 날씨가 좋은 탓에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ㅡ 모든 것을 포기하는 대신, 값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가우디의 건축물들을 관람했다.
힘들 것 같았던 바르셀로나에서의 4일을 알차게 보내곤, 의기양양하게 바르셀로나 공항으로 향했다.
아마 그때는 몰랐던 것 같다. 앞으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지.
저렴한 가격에만 정신이 팔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게 있었다.
'BCN - (FCO - LHR) - ICN, 총 36시간 소요'
바르셀로나와 인천 사이를 더 멀게 만드는 두 도시와 총 소요시간이었다.
그렇다. 나는 앞으로 세 번의 비행기를 더 타야 하고, 하루 넘게 공항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돈도 없고, 도시까지 가기는 또 시간이 애매해서 레이오버Lay over를 하기도 애매했다.
반강제적으로 오롯이 유럽 공항을 구석구석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일주일을 보낸, 알랭 드 보통도 꽤나 심심했겠지. 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쓸데없는 프랑스 작가에 대한 걱정과 푸념을 신호로, 36시간의 카운트다운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36시간, PM 1:00 : 바르셀로나 공항(BCN)
캐리어는 배편으로 보내서, 따로 수화물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셀프 저울에 배낭 두 개를 올려놓고 저울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시곗바늘도 저울 바늘처럼 빠르게 돌아갔으면 좋겠다.’
-32시간, PM 5:00 :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FCO)
어스름해질 때쯤, 로마의 어촌마을인 피우미치노Fiumicino 공항에 도착했다. 이 공항에서 몇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세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내일 아침까지 좀 자면서 버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탈리아에 온 기분을 내고 싶어서, 평소 잘 마시지도 않는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잔뜩 뿌려 홀짝- 들이켰다. 카페에서 새벽까지 시간을 때우려고 생각했는데, 종업원이 다가와서 갑자기 나가라고 한다.
‘내가 뭘... 뭘 잘못했다고?’
모든 상점들이 열 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고 했다.
출국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서, 몸을 기둥에 기대고는 노트북을 켰다. 그 노트북은 기나긴 여행에 지쳤는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수명을 다했다.
새벽시간이 되어, 졸음이 몰려왔지만 잘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공항이라고 하더라도 이곳은 소매치기로 악명이 높디높은 이탈리아 로마였기 때문이다.
내가 앉은 곳 반대편 의자에는 여럿이서 온 사람들이 불침번을 서며 돌아가며 자고 있었다.
나도 끼워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끼워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앉은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짐 걱정에 다시 깨고. 또다시 졸고를 반복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게 아침이 밝고,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이니셜이 드디어 출국장 모니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15시간, AM 10:00 : 런던 히드로 공항(LHR)
로마에서 런던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잠도 좀 자고, 몇 년 전에 올라간 적이 있던 알프스 산맥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드디어 4시간만 버티면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비행기 말고 내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공항을 더 구석구석 관찰했다. 런던스럽게 젠틀한 건축 구조물과 통유리로 비치는 햇빛과 알록달록한 비행기 꼬리날개가 상큼하게 느껴졌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서로에게 기대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그토록 떠나고 싶던 공항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갑자기 쏜살같이 흘러갔다. 잠에서 덜 깨서인지, 꿈에서 만난 천국처럼 이상한 황홀감에 휩싸였다.
-40분, AM 8:20(한국시간)
운 좋게도 마지막 비행기는 우리나라 항공사였다.
“마실 것 드릴까요?”
“네. 맥주 부탁드립니다.”
“하이네캔과 맥스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평소였다면 좋아하던 하이네켄을 택했을 텐데, 한국이 너무나도 그리웠던 나의 대답은. “맥스로 주세요.”였다.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맥스를 네 캔이나 마시고는, 깊은 잠이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 한국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창 밖을 보니 구름이 넘실거리는 게 배를 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몇 분 뒤, 구름을 뚫고 아래로 내려가자, 비행기 날개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아, 드디어 한국이구나!”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아침 안개 사이로 인천 앞바다의 선박들이 분주한 모습으로 반겨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오늘 월요일이지. 아-아- 이제 다시 저 풍경 속으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5분, AM 9:05
비행기가 착륙하고 아침 바람이 콧구멍으로 들어가자,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겹도록 길었던 공항에서의 36시간이 드디어 끝났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에 인사를 하고 보니, 그동안 보냈던 시간들. 끔찍했던 공항에서의 36시간까지 모두 좋았던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로마에서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벌벌 떨었지. 런던 히드로heathrow공항에서처럼 조금 더 즐겨볼걸.”
이 또한 지나가버렸는데, 더 즐기지 못한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이후로 나의 일상도 나를 반겨주던 인천의 선박들처럼 분주하게 바뀌었다. 얼굴의 탄력을 시간이 빼앗아 갔는지, 처진 얼굴과 대조적으로 시간은 꽤나 탄력적으로 튕겨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요즘 나는 “이 또한 지나 가리라.”라는 말 대신 “이 또한 쉽게 지나가지 않길.”염원한다.
나이가 들면서 느낀 것은 공항에서의 36시간처럼 아무리 힘들게 느껴지는 시간이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시간은 지나가서, 추억 속 한 장면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 장면들을 아름다운 것들로 채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로마 공항에서 느낀 공포보다는 히드로 공항에서 느낌 황홀함처럼 말이다.
‘너무 이상적인 말 아니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특히, 젊음은 그 순간이 너무 짧기에 아름답다.
만약 스킵Skip하고 싶은 상황 속에서 천사인지 악마인지 모를 생명체가 다가와 이렇게 질문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힘든 시간이 끝나는 순간으로 바로 이동시켜줄까요? 대신, 마흔이나 쉰의 나이일지도 몰라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거절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하지만, 실패와 역경 그 주변에는 거창하진 않아도 꽤나 따뜻하고 소중한 것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월요일 출근길, 빈 개찰구의 번호가 7번일 때. ‘오늘은 좀 행복한 월요일일까?’하는 기대감과. 힘들게 하는 상사에 대한 감정을 토해내며 동료와 서로 등 두들겨주던 목요일, 어느 짙게 물든 밤. 일요일 오전, 외출을 준비하며 머리를 말릴 때의 살랑이는 머리칼과 드라이기 바람까지.
고통보다 다른 것에 집중한다면, 우리 주변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
이 또한 어떻게든 지나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것들에 뜨거운 애정을 쏟아붓길 스스로 되내어본다. “이 또한 쉽게 지나가지 않길..”하고.
그저 지나가기만 바라기엔 젊음은 너무 짧고, 아름답다.
공항에서 36시간을* : 부제는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 제목에 착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