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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칼 맞을 뻔한 마라케시의 밤

2015 Marrakesh, Morocco

 마라케시Marrakesh 도착한 건, 거의 다 채워진 달이 내 정수리를 바라볼 때쯤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든든한 동료를 모으듯, 혼자 온 모로코에서도 동료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나의 모험을 함께 하게 된 동료는 네덜란드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R과 멕시코에서 오페라 가수를 하고 있는 S였다.ㅡ외모와 직업이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직업에 맞게 R은 철두철미하게 가격 흥정을 잘했고 S는 라디오 주파수가 잡히지 않는 택시에서 쥬크박스 역할을 했다.ㅡ 이렇게 자기 색이 강한 나름의 히어로들과 함께하니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마라케시에 도착하자마자 이러한 생각은 곧바로 깨지고 말았다. 마라케시의 밤은 굉장히 강렬했고, 온몸의 근육은 긴장상태로 되돌아갔다. 상인과 현지인, 관광객 모두 지금까지 방문한 지역 중에 그 숫자가 가장 많았고, 제마 엘프나 광장Djemma el Fna Square에는 피리로 코브라를 조종하는 사람, 원숭이로 묘기를 부리는 사람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으며, 광장의 한쪽 구석에는 정체모를 불기둥이 피어올라 있었다. 그 불 옆에 자리 잡은 음식점에서는 음주가 금기시되는 이슬람 율법을 조롱이라도 하듯, 몇몇이 둘러앉아 몰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저 멀리 떨어진 서쪽 해변 도시로부터 왔기 때문에 무척 피곤했다. 눈과 귀를 통해 피로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방어해야만 했고 입을 통해 들어오는 음식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모든 시끄러운 상황이 창틀을 프레임으로 하는 조용한 그림이 될 만큼 멀찍이 떨어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음식을 해치운 후 노곤한 상태로 미리 잡아둔 숙소에 들어갔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것만 같은 숙소 가운데는 리야드 양식에 맞춰 시원하게 하늘이 뚫려있었고, 그 위로 구름으로 얼룩진 달의 피곤한 얼굴이 보였다가 어느 순간 구름으로 만들어진 이불속으로 완전히 얼굴을 파묻었다. 숙소 건물을 구경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동료들은 잠에 들어있었다. (둘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일정이었다.)


 그들처럼 잠에 들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스쳐 지나간 사막 바지였다. 처음부터 모로코에 오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가방 속에는 모로코 여행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청바지나 면바지만 가득했다. 그래서 편해 보이는 그 사막바지가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낙타를 편하게 탈 수 있게 바지의 밑위가 종아리까지 내려와서 나풀거리는 사막바지는 사막의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일정상 당장 사지 않으면 살 시간이 없었고, 청바지를 입고 오랜 시간 낙타 타는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다리가 저려왔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엉덩이와 눈꺼풀을 이끌고 메디나Medina*로 향했다.


 그놈의 사막바지를 상인이 처음 제시한 가격의 1/5 금액으로 구매하고(모로코는 무조건 흥정이 필요하다.) 메디나 구석구석 구경을 시작했다. 지금껏 만나왔던 작은 메디나들과는 달리 거미줄처럼 유기적으로 뻗어져 나가는 몇천 개의 골목이 제각기 다른 매력으로 생동감을 주고 있었다.

 어느덧 피로는 잊고 이 매력적인 골목을 구경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감당하시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골목 갯수 때문인지, 도무지 핸드폰 GPS가 내 위치를 찾지 못하는 것이었다. 

 보통 현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친절함이 지나쳐 부담스럽게 부탁을 잘 들어주지만, 도움을 받고 나면 무엇이든 사례를 해야 하는 것이 이 지역의 암묵적인 규칙이었기 때문에, 굳이 도움을 받지 않고 여행을 이어왔다.

 하지만 늦은 밤 먹통이 된 핸드폰을 가진 관광객 혼자 숙소를 찾아갈 방법이 없었기에, 지나가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현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깡 마른 몸이 180정도되는 키를 가진 사내가 자기 몸집보다 훨씬 작은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메고, 빨간색 스냅백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개성 있고 자유로워 보였다. 

 “제마 엘프나 광장 아니?”

 내가 먼저 물어봤다.

 그는 흔쾌히 손짓을 하며 나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따라와 내가 데려다줄게!”


 광장으로 가는 내내 여러 몸짓과 의성어까지 보태 말을 걸어왔다.

 ‘사례를 두둑이 받으려고 용을 쓰는구먼 용을 써.’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몇 차례 사례금이 적다며(적어도 두 끼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은 돈을 줬는데도 말이다.) 사례를 하고도 욕먹은 적이 있어서 이러한 호의가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이 친구 “내 친구, 마이 프랜드”를 외치면서 자꾸 내 몸을 터치했다. 그 몸의 대화는 친근감 울 주기보다는 오히려 경계심을 심어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전재산이 항공점퍼의 어깨 주머니에 들어있었는데, 자꾸 그 부분을 건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싸한 느낌을 느낄 때쯤, 길가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가로등 불빛도 줄어들었다. GPS는 없었지만, 광장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로 가는 게 맞아? 나 제마 엘프나 광장 가야 해”

 “응 맞아, 여기 지름길이야”

 사실 일주일 넘게 모로코에 있으면서 사례를 바라는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으나, 순박한 모로코 현지인들이 고마웠던 적도 꽤나 있었다. 그런데 길을 알려주는 친구를 의심부터 하는 것은 동쪽의 예의 바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를 몇 분 더 따라가자, 막다른 골목이 나타났다.


 “어? 여기 길이 막혔네.”

 막다른 골목이 신호라도 되듯, 길을 알려주던 그 친구는 걸음을 멈췄고, 한쪽 어깨로만 메여 있던 가방을 땅으로 ‘툭’하고 떨어트렸다. 이어서 군인의 제식 동작처럼 반원을 그리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손에는 작은 칼이 들려져 있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본 적 있는 선인장처럼 생긴 칼날이 얼룩진 달빛에 매섭게 반짝거렸다.


 “돈 내놔!”

 방금까지는 친구라더니, 한국어로 하면 세음절인 한마디로 친구에서 강도로 변신을 했다. 변신 주문을 외우거나, 쫄쫄이 복장을 입는 것도 아니고 ‘돈 내놔’라니. 성의가 너무 없어서 돈을 줄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서 죽을 순 없으니까, 바지 주머니에 따로 보관하고 있던 동전과 지폐 한 장을 바닥에 던졌다. 근데 이 녀석, 내 전재산이 어깨 주머니에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거 말고, 거기 어깨 주머니 열고 돈 내놔”


 마라케시는 모로코의 딱 중간쯤 위치한 곳인데, 이 돈을 다 잃어버리면 사막에 가려던 계획과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에까지 차질이 생긴다. 이런 무성의한 애 때문에 사막 여행과 한국으로 돌아가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계획을 늦출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평소 자주 했던 농구 경기에서 상대방을 제치려면, 한 번 이쪽으로 가겠다는 신호를 과장하듯 준 뒤, 처음 방향과 반대로 내달리면 됐다. 농구에서 하던 대로 저 강도놈을 제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잠깐, 그럼 아까 던진 돈부터 줍자.”라고 말하고 자세를 숙인 다음, 동전을 줍다가 자연스럽게 육상선수들의 출발 자세를 취했다.

 ‘하나, 둘, 셋’ 

 초를 센 뒤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뉴턴 아저씨가 칭찬해줄 만큼 땅바닥과 내 신발 사이에 일어나는 작용과 반작용은 완벽했고, 가로등 불빛이 나올 때까지 달빛이 이끄는 대로 마구 달렸다. 

 코너를 두 개쯤 돌았을 때에도 여전히 인적이 드물었는데, 사거리에 불 꺼진 상점 하나가 보였다. 그 상점이 뭐하는 곳인지는 몰랐지만,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아직까지도 뭘 파는지 모르겠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실내에 있던 세명의 중년 남성들이 도박을 하다 걸리기도 한 듯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이들은 “왜 여기에 갑자기 쳐 들어왔고, 너는 누구냐?”라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좀처럼 영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이 중년의 현지인들이 칼을 든 친구와 연합해서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덜 떠는 다리와 함께,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쉿!’

 어쨌든 뭔가 일이 있으니, 조용히 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러고는 창 밖 거리를 봤다. 가로등 꺼진 사거리에는 강도로 변신한 그 녀석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그 녀석 옆으로 건장한 유럽인 무리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길 원한다는 특수성과 연대감이 있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가게에서 나와 유럽인 무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안한데 강도를 만나서 그런데, 같이 좀 움직일 수 있을까?”

 그들은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툭하고 튀어나온 나를 잠시나마 동료로 받아주었고, 여행을 망치거나 죽을 뻔한 위기의 순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광장에 거의 다 도착해서 그들과 헤어졌고, 얼마 남지 않은 광장을 홀로 걸어갔다.


 처음 광장 주변에서 봤던 간판이 보이는 걸로 봐서 광장에 거의 다 도착한 듯 보였다. 그런데 아까 그 강도와 비슷한 옷차림의 또 다른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 가?”

 “제나 엘마나 광장 가고 있어요. 숙소가 거기 있거든.”

 그 말을 꺼내자마자 그 사내는 내가 가던 맞는 방향과 반대방향ㅡ그러니까 내가 칼 맞을뻔한 그곳ㅡ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 그럼 거기 말고 저기로 가야 해요. 내가 안내해줄까요?”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가운데 손가락을 꺼내려다가 참고, 동료들이 보고 싶어서 골목을 빠르게 헤쳐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아무리 순박한 모로코 사람들이라고 해도 완전히 믿지는 말자. 관광객이 많고 상업적인 도시인 마라케시만큼은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메디나Medina* : 아랍어로 도시를 뜻하며, 옛 이슬람 구시가를 메디나라고 부른다. 메디나는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을 중심으로 많은 골목이 펼쳐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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