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지갑만 좀 조심해!"
J와 함께 런던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후, 한 해의 마지막 날 숙소 주변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J와 마음을 터 놓는 친구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가 오래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로 나를 정말 많이 찾아왔다. 그 무렵의 나는 여대 앞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럽 생활의 자금을 모으고 있을 때였고, 손님이 많지 않아 나를 찾아온 J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숙명여대 사람이 많지 않은 골목의 통유리의 하얀 건물, 거무튀튀한 사내 둘이 어울리지 않게 수다를 떨어댔다. 사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시답지 않은 농담들 뿐이었다. J가 경험한 상황을 나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기에, 괜한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 그래도 카페 음악 리스트에서 이별노래를 빼는 것도 가능했다.)
좋은 이별은 없지만 그의 이별은 정말 가혹했다. J와 함께 서울로 상경해, 꿈을 키우며 의형제처럼 믿고 의지했던 친한 형이 어느덧 그의 여자 친구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삼각관계의 주인공 중 한 명은 궤도를 이탈해야 했고, J는 어쩔 수 없이 추락하는 소행성이 되어야만 했다.
어쨌든 그때처럼 J가 나를 찾아왔다. 유럽 교환학생 생활이 끝나는 일정에 맞춰서 프라하로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그와 함께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인 십 이월의 유럽을 누비며, 예전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린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반 고흐가 귀를 자를 때 마셨던 압생트absinthe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다음 목적지에 대해 얘기했다.
"J야, 너는 다음은 어디 갈래?"
"형 저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피렌체로 가보고 싶어요."
그는 머리와 마음의 온도를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어딘가에 두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듯 보였고, 그런 이유로 이탈리아 피렌체로 떠난다고 했다.
반면에 나는 유럽이 이상하게 지겹게 느껴졌다.
"나는 그럼 유럽이 아닌 곳으로 갈 거야. 아마도 모로코로 갈 것 같아."
남은 돈으로 갈 수 있는 유럽이 아닌 곳 중 모로코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80도가량의 술을 먹었지만, 다음 날 이상하게 정신이 맑았다. J와 나는 목적지뿐만 아니라 공항도 달라서, 숙소 앞에서 헤어지기로 하고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J와 헤어지고 숙소 앞에서 스탠스테드 공항Stansted Airport행 버스에 탑승했다.
J와 헤어지기 전에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라고 말한 것은 학군단 출신에 산적처럼 생겼음에도 불구하고(미안...), 혼자 하는 여행에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든 처음 하면 겁이 나는 법!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저 말이 무척 도움이 됐던 기억이 있어서, 나도 그렇게 얘기를 했다.
20대 나의 여행은 대부분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준비 없이 떠난 모로코행 비행기 속에서도 걱정 따위는 없었다. 그저 비행기 유리창 밖에서 차가운 공기와 부딪혀 어딘지 모르게 더 붉게 느껴지는, 한 해의 마지막 노을빛이 움직이는 것을 관찰할 뿐이었다.
내가 앉은 좌석의 왼쪽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가, 사람들의 머리칼을 잠시 붉게 물들였다. 붉은빛의 다음 행선지는 비행기 천장, 머리카락에서 천장으로 점프를 했다가 다시 창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어딘가에 미련이 남은 행동처럼 보였다. 한 해가 또 이렇게 넘어가는 것을 저 멀리, 1억 5천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노을빛의 주인조차도 뜨겁게 아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비행기 창 밖을 어슬렁 거리던 노을빛이 완벽히 사라졌을 때, 비행기가 활주로에 소름을 일으키며 도착지인 모로코 라밧Rabat에 도착했다. 관광도시라기보다는 모로코의 수도로서 행정기관이 모여있는 도시였다. 밤이 늦어서 핸드폰 유심을 살 수 있는 곳이 없었고, 공항 와이파이로 미리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문자를 남겼다.
'유심 파는 곳이 문을 닫아서, 주소대로 찾아가 볼게요.'
호스트가 미리 적어놓은 설명대로 공항 리무진에 탑승해서 하차할 곳이 어딘지 보려는데, 낙서처럼 적힌 아랍어는 도무지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45인승 정도의 버스 승객은 나를 포함해서 네 명뿐이었고, 한 명씩 내릴 때마다 불안감이 더해졌다.
그 큰 버스에 버스기사님과 둘만 남게 되자, 기사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기사님, 저 여기 가야 하는데, 내릴 때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기사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이며 계속 운전했다. 그 미소에 안심이 되었고, 그렇게 10분쯤 더 달렸을까? 차를 세우며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도착했습니다. 근데, 밤이 늦어서 혼자서는 아마 길 못 찾을 거 같아요. 내가 골목까지 데려다 줄게요."
' 아니 이게 무슨! 이렇게 친절한 나라가 다 있다, 나야 좋지!'
감사함을 표하자마자 그 큰 버스로 작은 골목 안을 요리조리 비집고 들어갔다. 마치 소인국을 침략한 거인처럼 보였지만, 작은 동네에 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버스 기사는 여태껏 본 적 없는 미친 운전실력으로 버스에 상처 하나 없이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다.
모로코에서의 첫날부터 뭔가 이뤄낸 듯한 성취감에(비록 내가 한건 없지만.) 기사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내리려고 하는데, 기사 아저씨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갔다.
"청년, 여기 처음 와서 잘 모르나 본데, 모로코에서는 도움을 받으면 사례를 해야 해요. 뭐라도 없어요?"
그제서야 모로코 여행 책자에 적혀있던 글 하나가 떠올랐다.
모로코 사람들은 아무런 이득없이는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도움을 주면, 뭐라도 받으려고 하니 주의하세요.
그래도 한 밤중에 덕분에 편하게 왔으니, 한국에서 가져온 기념품(비싸 보이지만, 사실 저렴한) 하나를 건네주고 나서야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숙소 찾기 미션을 성공한 줄 알았는데, 내가 찾던 골목의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다. 그 동네 주변이 다 같은 이름의 골목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근처에 숙소가 있는 건 확실한데, 밤늦게 아랍어를 읽으며 숙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또다시 도움받을 수밖에 없어서, 지나가던 학생에게 호스트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었다.
"어? 저 이 여자애 알아요.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데, 대충 집이 어딘지는 알아요."
그를 따라 숙소를 찾아 나서는 동안, 나를 도와준다는 사람들이 더 달라붙었다.
최종적으로 다섯 명이 나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관광객을 도울(사례를 받을) 일이 생겨나서 그런 지, 신나 보였다. 어떤 아저씨는 먼저 찾으려고 뛰어가다가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동양인 한 명이 모로코의 수도에 도착했다는 걸 온 동네방네 알리고 나서야 내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들의 관례에 맞게 사례비를 먼저 내밀었다. 각자 햄버거 두 개씩은 먹을 수 있는 돈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무사히 숙소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다섯 명이 장난감을 사달라는 어린아이처럼 돈을 더 내놓으라며 쌩 떼를 피우기 시작했다.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몰랐으나 피곤해서 다들 꿀밤을 때려 돌려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순간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 등장했다.
숙소 주인아주머니였다. 한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남은 한 손으로는 삿대질을 하며, 강력한 소리를 뱉어댔다. 외모도 영화배우 김수미 씨를 닮아서 그런지, 전혀 모르는 언어였음에도 욕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례로 더 많은 돈을 요구하던 남자 다섯도 그 아주머니 한 명을 감당하기 어려운 눈치였다.
그렇게 이 에피소드는 끝이 났고, 뜨거운 물에 피로를 녹여낸 뒤 피렌체에 도착한 J에게 연락했다.
"아까 한 말 취소!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까 아니야."
나는 모로코의 문화라고는 하지만, 이런 방식의 도움주기 방식은 선호하지 않는다. 페이백Pay Back을 바라는 도움주기 방식 말이다. 핸드폰이나 신용카드 서비스에 가입하면 현금을 돌려주는 페이백처럼, 선의인 척 도움을 베풀고 나서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모로코식 도움주기이다.
'내가 뭔가를 도와주면, 쟤도 뭔가 해주겠지?' 또는 '내가 저번에 도와줬는데, 너는 왜 고맙다가 끝이야?'와 같은 말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도움주기 방식은 페이백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 선배에게 밥을 얻어먹고, "선배, 제가 다음에 살게요"라고 하면 돌아왔던 답은 "아니야, 내가 산 것처럼 너도 후배한테 사주면 돼!"였다.
돌려받을 걸 기대하고 뭔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식이었다. 내가 얻어먹었던 학식이 오늘까지도 이어져 내려가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렇게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가 다른 사람에게 퍼져나가길 바라는 방식이 Pay it Forward이다. 다시 되돌아오진 않지만, 방향을 가지고 퍼져나간다.
이게 얼마나 쿨하고 멋있는 선배의 모습일까? 아마도 모로코에는 좋은 선배들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데 요즘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로코식 도움주기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발견된다.
"내가 이거 도와줬으니까, 너는 내 편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저번에 요청 들어줬으니, 이번에는 제 일 좀 해주실래요?"
이런 말들로 페이백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경제적인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해서인지, 학창 시절 선배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니다. 단편적인 사례이지만, 이러한 모로코식 도움주기는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온전히 좋은 의도를 갖고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마저도 도움을 거절당하고 오해받기 일쑤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규정짓고, 자기 자신마저 이기적인 인간으로 여기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모로코 책자 속에 적힌 '도움을 함부로 받지 마라, 그들은 늘 댓가를 기대하며 도와준다.'라는 주의 사항이 사실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