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주키 Mar 27. 2021

칼 맞을 뻔한 파리의 새벽

2018 Mont Saint Michel, France

 한때 좋아했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며칠 후 파리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무작정 예매하고, 이틀 뒤에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가 여행을 준비하는 태도는 늘 이런 식이다. 사진 한 장에 빠져서든 바다표범이 보고 싶어서든 갑자기 어떤 여행지가 나를 부르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를 목놓아 기다렸다가 나를 불러주려는 기척이 느껴지면, 그게 나를 부르는 건지 내 옆사람을 부르는 건지 확인도 하지 않고 부랴부랴 여행을 떠난다.

 그날도 그랬다. 늘 그렇듯 떠나는 날 새벽에 캐리어에 짐을 때려 박고(때려 박는다는 말이 정확히 맞는 것 같다), 숙소는 경유지에서 정하기로 하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서 나에게만 허락된 좁은 자리에서 한숨을 돌리는 순간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나 환전 안 했지? 수수료 내는 대신 위스키는 사가지 말자.'

 그렇게 나만의 협상을 통해 현금 한 푼도 없이 여행을 떠났다. 다행히도 여행지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카드깡(?)을 하며 어느 정도 현금도 생겼고, 그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의 추천으로 여행의 후반부에 파리에서 대충 4시간 정도 떨어진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을 가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하울의 움직이는 섬'이라는 작품을 탄생시키게 한 장소이기도 한 몽생미셸은 낮 동안에는 썰물로 인해 이 바위섬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해주고, 해질 무렵이 되면 밀물이 밀려들어와 빨리 나가지 않으면 섬에 고립된다. 저 멀리 달이 이 수도원이 너무도 아름다워 직접 관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신비로운 곳이였다. 더 매력적인 것은 몽생미셸의 역사인데, 이 섬은 완공되기까지 8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그 이후에 프랑스 군의 요새로, 프랑스혁명 때는 감옥으로, 지금은 수도원으로 사용될 정도로 무수히 많은 이야기와 사연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몽생미셸 생각에 정신이 빠져있는데 여행하던 그 순간은 어땠을까? 온통 몽생미셸에 정신과 마음을 빼앗겨 파리의 마레지구에 있는 숙소로 돌아와 보니 새벽 두 시였다.

 다음 날은 체크아웃을 해야 해서 숙박비를 계산해야 했고, 현금으로 드리겠다고 집주인과 약속했던 터라 집 앞에 있는 현금 인출기로 향했다. 그것도 새벽 두 시에.


 몇 시간이 지난 후에도 몽생미셸의 잔상이 남아서 그런지, 아무 생각 없이 돈을 뽑아 지갑에 돈을 넣고 보니 뒤에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낌새가 이상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내 숙소를 가려던 차에 누군가 내 어깨를 '턱'하고 잡았다. 

 '누구지?'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등 뒤에 무언가가 차갑게 닿았는데,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190 정도 되어 보이는 포니테일 머리를 한 라틴계의 남자가 작은 칼을 내 등에 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돈을 달라고 하길래, 일단 돈을 꺼낼 테니 벤치에 잠깐 앉아달라고 얘기했다. 덜덜 떨면서 돈을 꺼내 그 거구의 남자에게 돈을 건네었는데, 이제는 또 핸드폰을 달라고 한다. 

 '아 제발, 하나님 이 핸드폰 할부금 23개월 남았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지금 빼앗기면 23개월 동안 고통을 느낄 것 같아요.'라고 속으로 울부짖고 있는데, 그때 마침 도로에 노란 택시가 등장했다.

강도와 몸싸움을 하며 핸드폰 카메라에 우연히 찍힌 불 꺼진 방들      2018 Le Marais, Paris

 나는 노란 택시가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택시 앞을 가로막고 "help me!"를 소년처럼 목놓아 외쳤다.

그런데 아뿔싸! 갑자기 거구의 강도와 택시기사가 조용하게 대화하는 게 아닌가. 내 들끓는 속마음과 대비대는 평화로운 협정이 끝나고 택시가 눈 밖으로 사라졌다. 협상에 성공한 산만한 덩치의 협상가는 사과만 한 주먹으로 내 어깨를 마구 쳤다.


 그래도 핸드폰만은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사과만 한 주먹과 한입 베어 먹은 사과가 그려진 핸드폰을 보니, 벤치 옆에 놓여있던 나무로 만든 사과박스가 생각이 났고 그걸 들고 허공에 휘둘렀다.

 강도의 계획대로라면 순순히 핸드폰을 받아서 발 닦고 자고도 남았을 시간일 텐데, 한국인의 매운맛을 처음 봐서 그런지 살짝 당황하는 듯 보였다. 나는 싸움은 못하지만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어서, 그 틈을 타 도망쳤다. 강도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영웅담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고, 숙소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강도가 무서워서 1시간 동안 밖에서 덜덜 떨다가 새벽 4시쯤 내 숙소 주변에 강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숙소 현관문을 열었다.

⏤내 숙소로 가려면 총 3개의 문을 지나야 했다. 오래된 빌라여서 그런지 1층의 현관문을 열고 꼬불꼬불 계단을 올라 문 2개를 더 열면 몽생미셸처럼 안락한 내 숙소가 나타난다.

 끼리릭-하고 오래된 현관문을 여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디에 그 큰 몸뚱이를 숨겨뒀었는지 갑자기 아까 그 강도가 나를 밀며 밀물과 같이 들어왔다.

 '이건 진짜 큰일이다. 저 현관문이 다시 닫히면, 1층 현관문과 꼬불꼬불 계단 사이에 쟤랑 나랑 오붓하게 몸의 대화를 나누겠지. 그러고 나는 내일 변사체로 발견되겠지. 뉴스에는 뭐라고 나올까? 전 여자 친구가 억울해할 것 같기도 하고.’ 그 짧은 순간에 별 생각을 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주먹을 등 뒤로 돌려 얼떨결에 그 거구의 턱주가리에 명중시켰다. 나도 모르게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어, 흔히 말하는 격투기 기술인 백 스핀 블로Back Spin Blow를 강도에게 날린 것이다.

 강도가 주춤하는 사이, 현관문 밖으로 달아났고 크게 놀라서 그런지 딸꾹질을 하며 한동안 내달렸다. 숙소에서 한참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럽게 딸꾹거리다가 아침이 밝고 나서야 안락한 숙소로 들어가 누울 수 있었다.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헤어짐과 아름다운 것에 정신을 빼앗길지라도, 새벽 현금인출은 절대. 절대로 하지 마세요.

이전 10화 나 홀로 여행; 서핑, 커피 그리고 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