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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esta Feb 15. 2020

<영화> 비포 선라이즈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한, 단 하룻밤의 로맨스




  자유롭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난 여행길. 볼 것도 즐길 것도 많지만, 가끔 무료하게 거리, 카페, 혹은 전철 안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그리고 여유를 즐기는 중 낯설지만 멋진 이성이 옆에 와 말을 걸어올 수도 있다. 어쩌면 그와 말이 생각보다 잘 통해 여행의 일부를 같이 보내기로 약속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할 잠깐의 시간이. 당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


 여행지의 만남은 수많은 가능성을 고 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평생을 갈 인연으로 남을 수도, 아니면 한눈판 새 캐리어를 훔쳐 달아날 사람일 수도 있다. 만약 인연으로 남는다고 해도 개인적인 차이부터 문화적인 차이를 넘어 만족스러운 관계로 발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곁가지를 생각하지 않고, 순수한 낭만과 사랑을 보기 위해 영화를 튼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조금의 비현실성을 받아들인 채 제시와 셀린의 사랑 이야기에 빠져 보자.



인연의 시작은 작은 용기로부터


 그들의 첫 만남은 기차에서 이루어졌다. 조용히 책을 읽다가, 옆에서 시끄럽게 싸우는 노부부를 피해 제시의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기는 셀린. 사랑의 마법이 사라진 부부로부터 새로운 사랑의 씨앗이 던져진다. 제시는 셀린에게 휴게실로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하고, 화는 진로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직 사회에 자리잡지 못한, 가족의 품에서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자연스러운 주제이다.


 그런데 제시의 목적지인 빈에 다 와 가는 중, 제시는 어린 시절 돌아가신 할머니의 환영을 본 이야기를 꺼내고, 셀린은 이를 보고 호기심을 느낀다. 빈의 승강장으로 들어가는 기차가 안타깝기만 하다. 매력적인 이성과 내밀하고 재미있는 대화를 이어가고,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도 생긴 마당, 기차가 역에 도착하면 그들은 아쉽게도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제시가 낸 용기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제시는 셀린에게 같이 역에서 내리자고 설득하고, 셀린은 설득에 응한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낭만의 영역으로 접어든다. 호감을 가진 남녀가 작은 용기를 내지 못해서, 씌여지지 못한 달콤한 로맨스가 얼마나 많을까! 이야기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걷은,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남자를 따라 내리자는 제시의 제안이 약간은 미친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도전은 그들에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 젊음이 요구하는 사랑은 서로를 아직 잘 모를 만큼 서툰 남녀가 서로에게 모든 걸 내어주는, 약간은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진솔한 대화 속 꽃피는 로맨스


 이 부분부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그들의 로맨스가 그리 자극적이지는 않다. 제시와 셀린이 만들어가는 사랑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적 제약 이외에 어떤 것도 그들의 사랑을 막는 장애물이 없다는 것이다. 둘이 같이 골목을 걷고, 관광지를 보고, 부랑자를 만나는 등 특별할 것 없는 배경. 하지만 그 위에 상대의 성격과 생각을 파악하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서로를 향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대사량이 그들의 연애담을 채운다.


 거의 대사로만 구성되어, 영화를 보고 나서도 마치 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로맨스. 나는 이 포인트가 비포 시리즈가 갖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그들이 외부의 극적인 사건 없이, 서로에게 집중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따라 울고 웃는 평범한 남녀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남녀들의 다이나믹한 기승전결을 갖춘 영화 속 사랑 이야기보다는, 우리가 겪어나갈 연애는 이런 모습일 것 같기 때문이고, 또 이런 모습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또 감독은 엄청난 대사량 속에 인물의 성격, 배경과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사랑을 피워가는 과정, 그리고 사랑 그 자체를 어떻게 보는지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표현하고 싶다면,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의 대화 속에 그의 생각을 불어넣는 것보다 정확하고 세련되게 이를 표현하는 수단이 존재할까? 그렇다고 감독이 영화에서 화면을 배제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음악 감상실 속 제시와 셀린의 눈빛을 한번 보자.  한마디 없이도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보도 위의 대화, 밤하늘 아래 와인과 사랑


 제시와 셀린의 대화 속엔 연애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커플 치고 한 가지가 부족해 보인다. 처음 만난 남녀가 친해질 때 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맞장구치는 의례적인 과정 대신, 그들의 대화는 어떤 주제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게 주된 내용이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통점에는 공감하지만 서로 다른 의견이라 해서 그들을 멀어지게 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커플, 제시와 셀린은 공감을 통해 가까워지지 않는다. 대신 서로 배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름을 인정한다. 그리고 너무나 다른 서로를 대화를 통해 차차 알아가는 게 이 커플이 친해지는 방식이다. 생각해 보자. 만약 우리가 여행을 가서 동행을 만났다고 가정하면, 첫 번째 대화 주제는 어떤 관광지를 보러 갈지, 여행 일정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한 의견을 서로 맞춰보지 않을까? 그러나 이들의 여행은 대부분 길 위에서 이루어지고, 걷다가 우연히 만나는 장소가 곧 그들의 여행지이다.


 생각해 보면 성숙한 연애란 길을 따라 걷는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존중하되 자신을 굽히지 않고, 손을 잡은 채 수다를 떨며 산책하는 것. 그렇다고 그들의 감정이 서로 맞닿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술집에서 '친구한테 전화'로 오늘 만난 멋진 이성을 칭찬하고, 와인을 몰래 가져와 밤하늘 아래서 마시다가 서로 눈이 맞아 입을 맞추고, 헤어지기 싫어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서로를 안을 때, 젊은 연인의 마음은 완벽하게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냥 오늘 밤을 멋지게 만들자


 사랑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의 감정 자극하는 부분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닌, 사랑을 이루는 길에 놓인 장애물이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비포 선라이즈>의 로맨스도 끝까지 순탄하게만 흘러갔다면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장애물은 눈에 띄지 않아 가끔 관객들이 잊기도 하는 사실, 이 낭만적인 이야기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다.


 여행 중 만난 인연이기에 더 특별하고, 더 솔직하고, 서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동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는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동화는 하룻밤 동안만 씌여질 수 있다는, 가슴 아픈 데드라인을 대가로 한다. 그들의 감정이 깊어질수록 보는 사람의 마음은 초조해진다.


 차라리 겉보기에 화려한 사랑 이야기라면, 화려한 패션으로 모든 관광지를 누비고 고급 호텔에서 밤을 불태운 후 헤어지는 이야기라면, 이 하룻밤이 아쉽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공들인 판타지가 아니다. 우리 일상으로 가져오고 싶은, 소박한 남녀의 아름다운 추억 이야기이다. 그들에게는 단 하룻밤이 주어져 있다. 이제 서로를 알기 시작했는데, 이제 막 서로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기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제목이 없던 그들의 관계는, 노을을 배경으로 한 관람차의 키스로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 뒤로 두 남녀는 셀린의 말대로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는 하룻밤의 판타지로 식히기엔 너무 깊은 감정을 낳았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직 젊지만 대답을 알 만큼은 성숙한 연인. 그들에겐 선택권이 없기에,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멋지게 보내기로 한다.


 오늘 밤을 멋있게 보내자.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자. 하루뿐인 인연이라도, 최대한 멋진 추억으로 남기면 그대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이 영화에서 가장 멋지게 와 닿은 장면이자, 제시와 샐린이 사랑의 장애물을 극복한 방법이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억의 가치는 사랑한 시간으로 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헤어지기 전 그들은 6개월 후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이 약속이 지켜질 가능성은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후 시리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에서 이어진다. 비포 시리즈의 또 다른 매력은 감독과 남녀 주인공이 시리즈와 함께 늙어간다는 점이고, 매 편에서 느껴지는 느낌도 약간은 다르다.


 <비포 선라이즈>는, 사람과 관계에 아직은 서툰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다. 그중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사랑하고 소통하는 법을 알기 위해 애쓰는, 젊은 남녀들을 위한 영화이다. 갓 성인에 발을 들이고 나서, 배낭 하나 들쳐 메고 떠나려는 꿈을 가진 모든 젊은 여행자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좁은 땅을 떠나 세계를 만나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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